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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나들이

신라 구산선문 중 충청지역 보령 성주사터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신라후기 한국의 불교는 화엄경을 위주로한 교종에서 금강경을 위주로한 선종으로 바뀌어 갔다. 교종(敎宗)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설법에 따른 경전화 된 교리를 중심으로 공부하고 수행하여 이땅에 부처님이 이룩하고자 한 화엄불국토를 이루고자 한 것이 목적이라면, 선종(禪宗)은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 궁극적 깨달음을 구하여 스스로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는 것이 목표였다.

 

다시 말하면 선종은 팔만대장경 경전 속 가르침 보다는 앞서 깨달은 선사들 처럼 스승으로 부터 받은 화두를 추구하여 자신만의 깨달음으로 풀기 위하여 좌선수행을 위주로 하는 선수행 불교다. 이런 선수행 위주의 불교는 일찍이 부처님 당시부터 인도에 있어왔지만, 선종이 화려하게 꽃피운 때는 당나라시절(600년대) 경전을 통한 불교공부를 전혀 하지 못했던 한 나뭇꾼이 시장에 나무를 팔러왔다가 어떤 스님이 읊조린 금강경의 한 구절을 듣고서 바로 부처님의 깨침을 얻은 뒤의 일이다.

 

그 나뭇꾼은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고, 당대 수백명의 제자를 거느린 선종의 대가인 홍인대사의 문하에 들어 갔다. 그런데 행자시절 방앗간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불교공부도 좌선수행도 하지도 못하던, 그는 홍인대사의 많은 제자들을 제치고 홍인대사의 뒤를 이은 선의 계승자가 됨으로써 선불교는 화려하게 꽃피웠다. 그 나뭇꾼이 바로 중국의 6조대사로 추앙받는 혜능스님인데, 그 이전 까지 선의 계승자는 당대 최고의 선사로 이어받은 계승자가, 오랫동안 수행한 제자들 가운데 오직 한사람의 수제자에게만 자신의 법맥을 전수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런데 6조 혜능대사 이후로는 깨달음을 인가 받는 수행자라만 누구나 인가를 받게 되었다. 따라서  같은 시대에도 많은 선사들이 나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은 물론 한국땅에서 수많은 선의 종사들이 배출되었고, 이에따라 신라땅에는 중국에 유학하여 여러 선사스승들로부터 깨달음을 인정 받은 신라의 후계선사들이 신라땅에 선불교를 퍼뜨리게 되었는데,  그것이 신라의 9곳 선종의 본찰들로 구산선문이 된 것이다.

 

이런 연유로 세워졌던 절 가운데 보령땅에 본부를 둔 선종사찰이 바로 성주사다. 성주사에는 신라말 821년(헌덕왕 13) 당나라 불광사로 유학을 갔던 무염스님이 첫 스승 여만스님으로부터 선법을 공부한 뒤, 당나라 시절 최고의 선사로 명성을 떨치던 '마조'스님의 직계수제자인 '마곡보철'스님으로부터 선문답을 통하여 인가를 받게되었다. 그런 뒤 무염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증명하기 위하여 중국땅 곳곳에에서 명성을 떨치던 선사들을 찾아가 선문답을 한 뒤 모두에게 인가를 받아서 동방(신라사람)의 대보살이라 추앙받았다.

 

그런데 당나라 후기 중국은 폐불정책으로 선불교가 위축되는 상황을 맞이하였고, 중국 각지에서 선사들로부터 인가를 받은 '무염'스님은 자신의 깨달음을 신라로 돌아와 선불교를 전파하고자 신라 문성왕 7년(845) 귀국하였다. 이후 좋은 명당터를 찾다가 이곳 보령땅에 이르러 당시 오합사가 있던 절을 성주산문의 본산으로 중창하여 주석하며 40여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에게 선법을 전수하였다. 그러다 888년(진성여왕 7년)에 이르러 88살에 입적하였고, 임금은 무염스님에게 '낭혜'라는 시호를 내리며, 당대 최고 문장가인 최치원에게 '무염'의 생애를 기록한 '낭혜화상백일보광탑비'를 짓게하고 비석을 세웠다.

 

낭혜화상 덕에 선의 종가가 된 성주사는 이후 화려하게 번창하였으나, 13세기에 절 전체가 불에 탔고, 이를 다시 중건하였는데, 절의 본당인 금당 앞에는 5층의 목탑자리에 5층석탑을 짓고, 금당 뒤에는 강당 앞에 3층석탑을 배치하여 하나의 절안에 4개의 석탑이 있는 독특한 형태의 가람배치를 갖추게 되었다.

 

하지만 이후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언제인지 폐사가 된 채 방치되었다가, 최근에 이르러 석조물들을 본래 모습으로 되살리고, 낭혜화상 무염스님의 비석에도 보호각을 세워 옛 자취를 알 수있게 하였다.  폐허가 된 성주사터를 돌아보면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하지만, 석조물 가운데서도 낭혜화상(무염)의 탑비는 있는데, 스님의 사리를 모셨던 승탑은 어디로 갔는지 위치도 형태도 보이지 않아 안타까움이 컸다. 지금은 멀지 않은 곳에 충남지역 사찰을 관할하는 본사로 수덕사가 있지만, 옛날에는 수덕사 보다는 이곳 성주사나, 서산의 보원사  예산의 가야사가 더 대단한 사찰이었다. 

 

 

기자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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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성 기자

최우성 (건축사.문화재수리기술자. 한겨레건축사사무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