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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허균, 조선의 개혁을 꿈꾸다

《인문주의자 허균, 개혁주의자 허균》, 중앙유라시아 문화연구센터, 스타북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아버지를 아버지라 하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하지 못하니…”

교산(較山) 허균(許筠, 1569~1618). 우리는 보통 그를 《홍길동전》의 지은이로 기억한다. 첩이 낳은 자식인 서얼의 한을 그린 홍길동전은 지금도 삼척동자가 알 만큼 유명한 고전소설이다. 홍길동을 통해 허균은 자신의 꿈을 실현한다. 모두가 평등한 나라, 율도국을 세워서 말이다.

 

허균은 역모죄로 능지처참을 당한 뒤 조선왕조가 무너질 때까지 유일하게 복권되지 못한, 조선 중기의 문제적 인물이다. 혹자는 그가 내심은 권력을 탐했고, 음험했으며, 세상과 영합했다고 비난한다. 그도 그럴 것이 6차례 파직을 당하고 3차례 귀양을 가면서도 말년에는 권력을 잡아 득세했고, 문벌이 도도한 가문에서 적자로 태어난 전형적인 ‘금수저’였던 그가 가지지 못한 자들의 울분에 얼마나 공감했겠냐는 ‘합리적인 의심’이 드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 책 《인문주의자 허균, 개혁주의자 허균》은 항변한다. 교산 허균은 진심이었다고. 명문가의 적자로 태어난 거칠 것 없는 신분임에도 서얼 차별을 반대했고, 시대가 강요하는 사상의 획일성에 반기를 들고 부패한 정치와 제도를 개혁하려 했으며, 오로지 두려워할 자는 백성뿐이라고 설파하며 왕조사회를 뒤흔들고, 더 나아가 바른 정치를 이끌어나갈 깨어있는 백성이 될 것을 촉구했다.

 

 

이 책은 중앙유라시아 문화연구센터에서 허균 서거 400돌이었던 2018년,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 강릉시의 후원으로 열린 허균 인문학 콘서트의 내용을 축약한 책이다. 이 콘서트는 1부 ‘인문주의자 허균, 그가 걸어온 길 위해서 오늘을 성찰하다’, 2부 ‘개혁주의자 허균, 미완성으로 끝난 개혁의 꿈’, 3부 ‘허균, 시대를 앞서간 자유주의자’로 구성되어 인문주의자, 개혁주의자, 자유주의자 허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인문주의자 허균은 빼어난 문장을 자랑했다. 그는 불교나 선교, 천주교 등에 심취했다는 이유와 반대 당파의 모략 등으로 6회나 파직을 당하고 3회나 귀양을 갔지만, 뛰어난 문장력만큼은 인정받아 중국 사신으로 5차례나 다녀오는 화려한 관료 생활을 했다. 중국에 외교사절단으로 가는 것은 뛰어난 글재주와 문학성을 인정받아야 가능했으니, 5차례나 파견된 것은 그의 문장력이 당대 최고 수준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왕성한 창작력으로 많은 문집을 지었다. 한번 스쳐 지나간 글은 잊어버리지 않는 비상한 기억력으로도 유명했다. 그 가운데 ‘푸줏간 앞에서 입맛을 다시다’라는 뜻의 《도문대작(屠門大嚼)》은 국내 최초의 음식서로, 지역의 명물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준다. 허균은 어릴 때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귀한 음식을 많이 맛본 덕분인지 고도로 발달된 미각을 가지고 있었다.

 

개혁주의자 허균의 면모는 성리학뿐만 아니라 불교, 도교, 서학 등 모든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자유분방한 사상의 소유자라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에 천주교 서적을 가장 처음 소개한 사람이 바로 허균이다. 허균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며 서양 지도와 함께 《게십이장((偈十二章), 기도서)》을 가져왔고, 서적을 읽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고 따르기도 했다.

 

허균은 또한 사회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던 개혁가였고, 이를 주장한 논설을 많이 남겼다. 허균의 개혁 사상은 ‘호민론’의 혁명사상, ‘관론’과 ‘후록론’의 민본사상, ‘병론’의 국방개혁사상, ‘유재론’의 신분차별타파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며, 그 중 특히 ‘호민론’이 많이 알려져 있다.

 

(p.85)

허균은 「호민론(豪民論)」에서 나라의 주인인 백성을 항민(恒民), 원민(怨民), 호민(豪民)으로 구분하였다. 항민은 ‘무식하고 천하며,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주장할 의식이 없는 백성’을 말한다. 지식이 없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의식도 없는 항민은 독재자들의 가장 좋은 수탈의 대상이 되어 왔다. 원민(怨民)은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어도 원망만 하고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백성’을 말한다. 이들은 의식은 있으나 그것을 스스로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나약한 집단이다. 지금의 나약한 지식인이나 소시민과 같은 집단으로 단순한 불평세력으로 존재한다. 호민(豪民)은 ‘자신이 받는 부당한 대우와 사회 모순에 과감하게 대응하는 백성’을 뜻한다. 이들은 시대의 사명을 인식하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인물들이다. 즉 호민의 주도로 원민과 항민이 합세하여 무도한 무리들을 물리침으로써 개혁이 달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유분방한 사상과 개혁적 사고는 주위를 불편하게 했다. 《선조실록》에 남겨진 인물평에서도 ‘글을 잘하나, 사람됨이 경박하고 행실도 수치도 없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평가된 부분이 많다. 오로지 성리학만을 신봉하고, 적자와 서얼이 유별하며, 백성은 그저 교화에 복종해야 한다는 발상이 지배적이던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허균은 ‘참 능력 있지만, 진짜 재수없는’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자 허균은 개의치 않았다. 상대 당의 공격을 받아 또다시 파직되었을 때, 그는 담담히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p.134)

파직 소식을 듣고서 짓다

 

예의 가르침이 어찌 나를 구속하리오

인생의 부침을 그저 마음에 맡길 뿐

그대들은 그대들의 법도를 따르시게

나는 스스로 나의 삶을 이루겠노라

 

인간 허균은 실로 결점이 많았을 수 있다. 강하고 직설적인 성격에, 오만하고 무례하고 경망스러운 구석이 있었을 수도 있다. 기록에 남겨진 그의 근무태도는 공직자로서 부적절한 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금수저끼리만 어울리던 시대에 소외되고 차별받던 이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렸고, 신분과 관계없이 상대방의 능력을 보았으며, 백성들에게도 깨어있는 백성이 될 것을 독려했다.

 

이런 허균의 준엄한 가르침을 대하고 보니, 그간 불의를 겪으면서도 원망만 할 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원민으로 살았던 것 같아 문득 부끄러운 마음이 든다. 원민에서 호민이 되기까지는 더욱 큰 노력과 배움이 필요하겠지만, 응당 깨어있는 지식인, 호민으로 살 것을 다짐해본다.

 

이 책은 한 번쯤 들어봤으면서도 자세히는 몰랐을 허균의 생애를 짧지만 깊이 있게 파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다소 편집이 엉성한 점은 아쉽지만,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라. 나는 내 길을 간다’라며 ‘마이웨이’를 외쳤던 허균의 사상과 생애가 궁금한 독자라면,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