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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

11월 독립운동가, 박건병ㆍ강경선ㆍ배천택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을 위해 주도적 활동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1920년대 중국 북경과 상하이 등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독립운동을 통합한 단체인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이하‘촉성회’) 결성에 참여한 박건병ㆍ강경선ㆍ배천택 선생을 2022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꼽았다."라고 밝혔다.

 

■ 강원도 김화 출생(1892년)의 박건병 선생은 1919년 5월 서울에서 결성된 임시정부 지원단체인 대한독립애국단 소속 강원도 철원군단(鐵原群團, 일명 철원애국단)에서 학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를 선전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벌였다. 상하이로 망명한 뒤 1920년 1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강원도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4년 8월 북경한교동지회(北京韓僑同志會) 결성에 참여하여 기관지인 ‘도보(導報)’의 집필진으로 참여, 강력한 투쟁을 바탕으로 한 독립운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1927년 북경에서 관내 촉성회 연합회가 결성되자 15인의 집행위원으로 뽑혔고, 1928년 5월 만주에서 전민족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열렸을 때 북경대표로 참석했다. 하지만, 촉성회는 1928년 5월 주요 인물들이 체포되면서 활동이 위축되었고, 1929년 해체 수순을 밟았다.

 

 

 

■ 1891년 평북 정주에서 태어난 강경선 선생은 1920년 12월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의 간사로 활약했고, 1921년 11월 대한적십자회에서 상의원(常議員)에 뽑혔다. 이후 중국 안동현(安東縣)에 있는 이륭양행을 통하여 국내 정보를 수집해서 임시정부에 연락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이후 상하이 상해대한교민단(上海大韓僑民團) 의원을 맡아 활동했고, 1926년 인성학교에서 교감으로 후진양성을 위해 노력했으며, 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평안도 의원으로 뽑히기도 했다.

 

북경지역에서 한국유일독립당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상하이지역에서도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주의자들이 좌우합작을 위해 노력하는 등 1927년 한국유일독립당 상해촉성회 설립에 이바지했다. 선생은 촉성회에 참여하여 25명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혀 독립운동의 활로 모색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 경북 대구 출생(1892년)의 배천택 선생은 1919년 중국 류하현(柳河縣)에 있는 군정부(軍政府)가 서로군정서로 개편될 때 참여했고,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의 3인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 비서장(祕書長)에 뽑혔다. 또한, 1926년 7월 북경에서 북경촉성회를 조직할 때 집행위원으로 뽑혀 창립선언서를 기초하였고, 1927년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 결성에 참여하여 15인의 집행위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혔을 뿐만 아니라 5인의 상무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929년 촉성회가 해체되자 선생은 1930년 2월 북경에서 한족동맹회(韓族同盟會) 결성은 물론, 1932년 상하이에서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 창당과 1934년 난징에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 결성에도 참여하여 당시 중국지역에서 진행된 정당통일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 박건병ㆍ강경선ㆍ배천택 선생은 중국지역에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가 하나 된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박건병 선생은 1993년, 강경선 선생은 1995년 각각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으며, 배천택 선생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