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기자] 한국국학진흥원(원장 정종섭)은 제례문화의 바람직한 계승을 위해 ‘제례문화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라는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첫 번째 주제(제사상과 차례상)에 이어 두 번째는 “고조부모까지의 4대봉사, 그 숨겨진 진실”이다.
4대봉사는 절대적 규범인가?
조상제사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고조부모까지 지낸다. 이것을 4대봉사라고 한다. 그런데 4대봉사가 절대적 규범은 아니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누가, 누구의 제사를 지내는지를 법으로 규정해두었다. 1484년 성종 때 펴낸 조선시대의 법전 《경국대전》에는 “6품 이상의 관료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3대까지를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벼슬이 없는 서민은 부모 제사만을 지낸다”고 명시되어 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시대는 관직의 품계를 중심으로 상하 구분을 했는데, 6품 이상(현재 공무원 5급 이상)은 증조부모까지의 제사를, 7품 이하(현재 공무원 6급 이하)는 조부모까지의 제사를, 관직에 오르지 않은 일반 백성들은 부모의 제사만을 지내도록 법률로 제정해둔 것이다. 이처럼 조선시대에는 고조부모까지의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4대봉사원칙이 제도적으로 명시된 적은 없었다.
4대봉사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가?
한국국학진흥원 김미영 수석연구위원에 따르면 《경국대전》을 비롯하여 1474년에 편찬된 《국조오례의》 등에도 신분별로 조상제사의 대상에 차등을 두고 있었으나, 주자가례를 신봉하는 유학자들에 의해 4대봉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원래 유교에서는 신분에 따라 조상제사의 대상을 각각 달리했는데, 주자가례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4대봉사를 주장하면서 정착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사실 조선시대에는 15살 앞뒤의 어린 나이에 혼인하는 조혼(早婚) 습속에 의해 고조부모까지 4대가 함께 사는 경우가 흔했기에 고조부모의 제사를 모시는 4대봉사가 당연시되었으나, 조혼 습속이 사라진 오늘날에는 고조부모나 증조부모를 대면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고 또 기억도 없는 상황에서 4대봉사를 이어간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라는 의견이 많다.
김미영 수석연구위원은 “유교적 성향이 강한 경북지역의 종가에서도 증조부모까지의 3대봉사, 조부모까지의 2대봉사로 변화하는 사례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이때 생전에 뵌 적이 있는 ‘대면조상’인지 아닌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그 까닭은 조상에 대한 기억이 많을수록 제사에 임하는 정감이 다르기 때문이다”고 한다. 조상제사는 개개인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종의 추모의례이다. 따라서 조상과 생전에 주고받은 정서적 추억이 풍부할수록 추모의 심정은 더욱 간절해진다. 이런 점에서 조상제사의 대상을 ‘대면조상’으로 한정시키는 것은 매우 합리적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