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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끊어진 자리(言語道斷)

산사에서 띄우는 편지 1

[우리문화신문=일취 스님]  세상사는 언어에 이끌려가고 언어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언어가 인간관계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동이 트면 새벽같이 창 너머에서 조잘대는 참새도 그렇고, 밤새워 임을 부르는 소쩍새나 생명을 가진 모든 유정들은 자기들만의 언어로 소통을 할 것이다.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은 말할 것도 없다.

 

아기가 엄마의 태 속에서 세상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응애~’ 소리 질러 우는데 그 아이의 언어는 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구상 언어는 나라마다 다르고 다양하다. 언어가 다르다고 하지만 소통에는 서로 막힘이 없다. 한 치 오차 없이 유연하게 잘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는 크게 두 가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부정과 긍정으로 나누어 볼 때, 말 한마디가 약이 되고 독이 된다는 양면성을 지닌다. 예를 들면,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라는 말이 있는가 하면 “언중유골(言中有骨)” 곧 ‘말속에 뼈가 있다’라는 말처럼 한마디 말이 사람을 해치는 독화살 같은 것도 있다. 그래서 언어는 인간관계 속에서 불멸의 화신처럼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여 행복을 주기도 하고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하기도 한다.

 

요즘은 정보통신(IT)기술 발달로 말 대신 손말틀(모바일)과 PDA로 의사전달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느 때고 입을 통한 언어는 막을 수도 쉴 수도 없다. 요즘 젊은이들 대화 속에는 난해한 신조어나 은어(隱語)가 계층 간의 영역을 뛰어넘기도 한다.

 

이런 언어의 다양성을 살펴보면, 고대 소크라테스가 민중을 설득하는 강론이나, 공자가 말하는 ‘인(仁)’이라고 하는 대화법, 그리고 석가의 화술인 ‘대기설법(對機說法: 듣는 사람의 이해 능력에 맞추어 하는 언어) 등은 언어에 대한 선도적 가치관을 둔 화법이라고 하겠지만, 저잣거리 속어나 지역적 사투리나 비어들은 그들만의 풍습과 고유성을 지니고 있어서 좋고 나쁨을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나 요즘 텔레비전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끝없는 설전과 논쟁들은 향방을 가리기 어려운 무중무색(霧中無色) 심각한 언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러한 언어는 시공을 초월하여 진실과 거짓, 왜곡할 것 없이 시청자들을 어지럽게 할 뿐이다. 이런 현상을 불가에서는 업장 곧 아뢰야식(阿賴耶識, 모든 행위를 그대로 받아들여 저장. 만법 연기의 근본임)에 저장된다고도 했다.

 

이렇게 정제되지 않은 언어의 폭주 속에 언어 절제란 대명제가 등장하게 되고, 이러한 악순환을 끊기 위해 어쩌면 언어도단(言語道斷)이란 용어가 생겨났는지 모른다.

 

’언어도단‘이란 말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최상의 진리, 선가에서 이심전심으로만 전수되는 진리의 본체를 가리키는 말이요, 언어로는 도저히 말할 수 없는 경지, 언어 밖의 도(道)를 가리킨다. 그 깊은 뜻은 문자나 언어로는 전할 수 없다고도 하는데, 세속에서는 이 언어를 빌려 ‘말도 안 된다.’, ‘지나치게 엄청나게 사리에 어긋날 때‘를 가리켜 언어도단이란 용어를 인용하기도 한다.

 

언어도단의 더 깊은 의미를 상정한다면 진제(眞諦/勝義諦)와 속제(俗諦/世俗諦)로 나눈다. 진제는 ‘진리’ 그 자체인 ‘공(空)과 깨달음’이요, 속제는 ‘세상의 일반 사람들에게 알려진 평범한 도리’로 풀이된다. 언어도단이란 어휘의 말뜻에는 ‘말을 멈추어버린 자리’, ‘더는 말로써 뜻을 밝히지 말라’고 경계를 내세운다. 하지만, 세상사 이심전심(以心傳心)이나 묵언(黙言)으로 살아가기란 극히 어렵다.

 

그러므로 언어는 상호 간 소통을 필두로 편리성과 합리성이 요구되기도 하여, 흐르는 물처럼 원활성과 저잣거리에서 걸림 없이 쏟아내는 풍자와 막말 속에서 맛깔스러운 언어적 묘미를 조명해 볼 수 있다.

 

 

막스 피카르트는 그의 저서 《인간과 말》에서 “인간의 언어는 세계의 질서 속에 짜 넣어진 무늬다.”라고 하였다. 말이 없으면 글도 없고 역사도 없고 과거도 미래도 없는 현존 질서의 일부인 사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가 선방에서는 왜 ‘무자화두(無字話頭, 본래 아무것도 없다)’를 들고 무문관(일정 기간 수행하는 폐쇄된 공간) 수행을 하고 있을까? 그것은 언어가 끊어진 자리의 묘법(妙法)을 찾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는 데서 기인하였을 것이다.

 

화두 참선의 묘미는 언어 없이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천리안을 가진 것처럼 모든 것을 통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니라, 세속에서 흔히 쓰는 "눈으로 말해요"란 말과 상통한다고 하겠다. 그럴 수도 있다. 꼭 말로 하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충분하게 의사전달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책에서 “눈이 멀어도 보이고 / 귀를 막아도 들리고 / 입을 다물고 있어도 말을 할 수 있는 통찰”이라고 했고, 막스는 “침묵은 말보다 강하다. 침묵이 강한 까닭은 말이 침묵에서 나오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선가에서 ‘어묵동정(語默動靜)’은 “정체(停滯)가 아닌 무언은 소통과 협력의 걸림 없는 흐름”이라고 했다. 그런 영감으로 소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묵언 속의 대화로 요즘 세상에 때때로 필요한 수행 방법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언어는 상생의 수단이기 때문에 말문을 열지라도 존중과 배려 아름다운 언어를 지향해야 하고, 불현듯 튀어나오는 구업(口業, 사람이 말로 짓는 네 가지 업 곧 망어(妄語), 악구(惡口), 양설(兩舌), 기어(綺語)의 독소를 항상 경계해야 할 것이다. 말이 아니라면 즉시 언어도단의 취모리검(吹毛利劍: 지혜의 칼로 가는 머리카락을 단번에 끊어버리는 예리한 칼)을 들이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막스 피카르트가 “말은 빛과 같다. 자기 자신의 자리에 머물면서 동시에 모든 것에 치우쳐 있다. 하나의 말을 들으면 하나의 빛을 보는 것이다.”라고 하였듯이 언어의 혼탁 속에서 소중한 자기 자신을 청렴하게 지키고 존재 값어치를 높이려면 언제라도 ‘말이 끊어진 자리’에서 조용하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조고각하(照顧脚下)’란 말을 잘 수용해 볼 필요가 있다.

 

 

     일취스님

 

  한국화 작가(소봉 모성수 화백 사사)  

  위덕대학교 불교문화 박사과정 연구

  불교사물 사진작가(1987 입문)

  선학(마마타ㆍ위빠사나) 효담화상 사사

      (사)생전예수시왕생칠재보존회(경기도무형문화재제66호)

  해동문인협회 영등포지회 회원

  현 청정심원(선원) 선원장

      저서  《붓다와 108유희》, 코치커뮤니케이션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찾아서》, 코치커뮤니케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