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바다 한 가운데 구형의 검은 배가 한 척 떠 있다. 그 배는 하나의 세상이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유토피아 ‘뭍’을 그리며 긴 시간 표류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허나 그들 모두가 조금씩 뭍에 대한 열망을 잊을 정도로 힘든 나날을 마주한다. 빵을 하나 훔친 죄로 19년 감옥 생활을 하는 장씨, 미혼모라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은 미영, 장래에 대한 계획보다 혁명의 바리케이드를 세우는 청년 백군과 거리를 떠돌며 물건을 팔아 하루하루 버텨가는 아이 가열찬까지.”
<구구선 사람들>의 줄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제 4월 7일(금) 저녁 7시 서울 종로5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에서는 <판소리 레미제라블 – 구구선 사람들> 공연이 열렸다. 이 공연은 창작판소리로 내놓고 있지만 단순한 창작판소리가 아니라 완창판소리 형태를 띤 뮤지컬이다. 그만큼 구성도 어렵고 풀어나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님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기자는 예전에, 이미 8시간 30분가량이 걸린 대전시무형문화재 판소리 보유자 고향님 명창의 동초제 춘향가를 취재한 적이 있었고, 임진택 명창의 여러 창작판소리를 만나본 적이 있어서 이를 견줘볼 생각으로 이날 공연에 임했다.
“Yes I am Code 5
나의 이름은 우우우우우 코드 파-이브!
매일 아침에 눈을 뜨면서 절망을 느껴요!
아무나 내게 새 코드를 줘요!
아무나 내게 새 코드를 줘요!
우---우---코드 파-이브
나의 이름은 우우우우우 코드 파-이브!
감옥에 닫힌 나는 오늘도 눈물을 흘려요!
세상은 온통 창살 없는 감옥!
세상은 온통 창살 없는 감옥!”
소리꾼은 그렇게 소리한다. 세상을 향해 그렇게 외친다. 눈물 나는 코드 넘버 파이브를 달고 사는 주인공 장씨. 소리꾼 이승희는 전통 소리로 전체 판을 이끌며, 화자 주인공 장씨와 등장인물을 넘나든다. 고수 김홍식은 전통 고법을 사용해 소리판의 중심을 잡고, 소리꾼의 이야기가 관객에게 잘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소리꾼 김소진은 ‘가열찬(가브로슈)’ 역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장면마다 이야기의 서늘한 이면을 만들어 낸다. 배우 백종승은 ‘백군(마리우스)’역을 맡아 다양한 모습으로 불합리한 시대의 청년들을 대변한다.
그 밖에 고수이자 키보드를 담당한 이향하와 기타리스트이자 자작가수(싱어송라이터) 김홍갑, 드러머 이유준이 만드는 밴드 사운드는 독창적이면서도 생동감 있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들은 백군, 아홉살 꼬마 가열찬과 함께 ‘개미굴 밴드(아베쎄의 벗들)’로 출연해 노래로 세상의 부조리를 알리는 역할을 맡는다.
원래 완창 판소리란 적어도 3시간 이상 8시간이 넘는 동안 소리꾼 홀로 사투해야만 하기에 주역 소리꾼은 뛰어난 체력과 정신력에 완벽한 소리 내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한 청중도 그에 못지않은 인내심과 판소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이런 어려움을 감내하기란 쉽지 않기에 이날 공연은 그런 점을 슬기롭게 풀어헤친다.
곧 주역 소리꾼이 지칠 만하면 틈을 내서 ‘가열찬’이 등장하여 이야기의 서늘한 이면을 만들어 내고 ‘백군’이 튀어나와 다양한 모습으로 불합리한 시대의 청년들을 대변한다. ‘가열찬’과 ‘백군’은 소리로써 표현하기도 하지만, 민요풍으로 노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청중들에게 지루할 틈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또한 이 공연은 전통적인 완창 판소리의 형태에서 벗어나 뮤지컬을 가미해 이 시대에 돋보이는 공연 형식을 끌어냈다. 소리꾼과 고수 중심의 ‘전통판소리’에 배우, 자작가수(싱어송라이터), 드러머, 기타리스트 등과 협업해 대중적인 감성을 더했음을 물론 비장하고 엄숙한 이야기 가운데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판소리식 유머와 재담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판소리에 오랫동안 심취해 있지 못하는 청중을 위해서 곳곳에 민요풍이나 가요풍의 노래를 삽입하고 화려한 드럼 연주를 가미하며, 적절한 조명을 써서 공연을 삭막한 모습으로 빠지지 않게 노력한 점도 돋보인 것이다.
다만, 이 공연에 약간의 미흡함도 보인다. 특히 주역 소리꾼이 조금은 긴장했다는 느낌을 받았았다. 물론 완창형이고 이제 시작하는 공연이다보니 참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작창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아니리(창을 하는 중간에 장면의 변화나 정경 묘사를 위해 이야기하듯 엮어 나가는, 창 아닌 말)를 효과적으로 쓰고 전라도 사투리를 적절히 끼워 넣어서 판소리의 느낌을 살릴 수 있었으면 좋았을 법했다.
그리고 공연 시작 전 청중들에게 추임새를 가르쳐주고 적극적으로 추임새를 활용했다면 공연 분위기를 더욱 활성화했을 것이다. 이런 점을 다듬어 나간다면 <판소리 레미제라블 – 구구선 사람들>은 새로운 창작판소리로 우뚝 서게 될 것으로 믿는다.
주역 소리꾼 이승희는 “언제나 100에 가닿지 못하고 99에 그치고 마는 세상에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는 불쌍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지금 우리와 닮았다. 뭍을 꿈꾸며 가슴 속 작은 혁명의 불씨를 태우는 평범한 이들을 보며, 우리의 ‘배’는 무엇을 향해 가고 있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공연 내내 부조리한 세상을 거부하고 모두가 더불어 사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고 외치고 있었다.
이 공연을 기획하고 풀어낸 ‘입과손스튜디오’ 책임프로듀서 유현진은 “지난 3년 동안 진행된 완창형 판소리 제작 프로젝트를 기획할 당시, ‘입과손스튜디오’가 찾고자 했던 이야기는 가장 판소리다운 이야기였다. 다양한 인간군상이 포함되어 있고, 한 세기를 압축하는 이야기 「레미제라블」이 적격이었다. 더구나 빅토르 위고는 비참한 삶을 견뎌야만 하는 민중들을 위해 「레미제라블」을 썼다. 그가 쓴 작품 속에 창조된 인물들은 포기할 줄 모르고 어둠 속에서 빛을 낸다. 암흑 같은 현실 속에서도 끊임없이 변화와 진보를 믿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입과손스튜디오’는 관객들과 함께 우리가 사는 시대, 그 안에 우리를 비춰보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재)예술경영지원센터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판소리 레미제라블 – 구구선 사람들>의 정식 공연은 4월 8일부터 시작하여 22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에서 열린다. 제작진은 공동창작 ‘입과손스튜디오’, 프로듀서 유현진, 무대감독 김지명, 무대디자인 남경식, 조명디자인 신동선, 음향디자인 장태순이 함께 한다. 또 출연진에는 소리꾼에 이승희, 고수에 김홍식, 또 다른 소리꾼과 가열찬 역에 김소진, 백군 역에 백종승, 키보드에 이향하, 기타에 김홍갑, 드럼에 이유준이 무대에 오른다.
관람료는 전석 35,000원이며, 두산아트센터 (doosanartcenter.com)와 인터파크 티켓 (ticket.interpark.com)에서 예매할 수 있다. 공연에 관한 문의는 ‘입과손스튜디오’ 전화(070-8848-0124)로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