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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저갱도의 뜨거운 열기 속에서 탄을 캐던 조선인들

일본의 조선인 강제징용 부정에 대한 반박 글 (4)
맛있는 일본이야기 < 685 >

[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아버지가 번역한 일본어판 《백범일지》를 5년의 노력 끝에 펴낸 류리수 박사가 며칠 전 글을 보내왔다.  류리수 박사는 최근 일본 외상의 '조선인 강제징용을 부정'하는 뻔뻔스러움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어서 예전에 한국문학지에 번역해서 소개했던 시 몇편과 해설이 실린 글을 필자에게 보내왔다. 글의 내용을 읽고 보니 필자 혼자 보기 아까워 5회의 연재로 싣는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빈다. (연재 글은  류리수 박사가 미츠다 이쿠오 교수의 글을 정리한 것임) - 기자의 말- "

 

이번 글은 미츠다 이쿠오(満田郁夫)교수가  I 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다.   I 씨는 미츠다 교수가 오랜 연구생활을 해오면서 깊은 교분을 맺어온 K출판사 사람이다.  I 씨는 어린 시절 죠반(常磐)탄광 해저 갱도에서 조선인 강제노동 상황을 목격한 상황을 미츠다 교수에게 들려주었고 미츠다 교수는 한국에 그 내용을 공개하였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K출판사의 I 씨는 우리가 계속 펴내 온 동인잡지를 언제나 응원해 주던 사람으로 잡지 간행을 하는 동안 아주 친해졌다. 1980년대 어느 날  I 씨는 죠반(常磐)선 열차를 타고 논밭이 펼쳐진 시골마을 고향집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그 집에서 하룻밤 묵은 다음 날, 그 근처에 있는 일본 첫 동해촌(東海村) 원자로로 나를 데려간 I 씨는 그저 그 주위를 빙빙 맴돌기만 했다"라고 했다.

 

그런 뒤 I 씨는 미츠다 교수에게 “당신 집으로 나를 데려가 달라. 당신의 어머니를 만나고 싶다”라고 했다. 그래서 미츠다 교수는 I 씨를 데리고 죠반선 기차를 타고 고향집에 가서 어머니를 만나게 했다. I 씨는 몹시 기뻐했고 어머니도 I 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살갑게 대하며 돌아갈 때 꽃모종을 주었다고 했다. I 씨는 또 인근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를 보고 싶다고 해서 데려갔는데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며 원자력발전소가 걱정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리고서 함께 도쿄로 돌아오는 길에  I 씨는 아무에게도 꺼내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한다.

 

“I 씨는 죠반탄광의 해저 갱도에서 징용으로 끌려와서 일하고 있던 조선인들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줄 줄 몰랐고 그의 이야기도 뜨문뜨문 끊겨서 잘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I 씨는 중학교를 마치고 죠반탄광에서 일했던 적이 있었다. 점점 바다 밑으로 갱도를 뻗어 내려가던 이 탄광은 거의 해저 탄광이라고 부를 정도로 파들어 갔다. 해저에서는 뜨거운 물이 솟구쳐 나와서 그것을 퍼내고 석탄을 파내는 일을 해야 하는데 상당한 중노동이다. 뜨거우니까 일하고 있는 조선인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거의 알몸이다. 어둠 속에서 그렇게 일하다 보니 끊임없이 아이가 생겼다고 했다. 그 아이들은 어떤 운명의 길을 걸었을까?” (2018.10.18. 미츠다 이쿠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던 미츠다 교수로부터 바로 다음 날 이런 편지가 왔다. “혹시 내 이야기를 번역해서 발표할 경우에는, 죠반탄광의 해저 갱도 이야기를 해준 I 씨의 회사명과 이름은 머리글자만 쓰고 실명은 가려주시지 않겠습니까? (필자주-미츠타 교수의 부탁에 따라 실명을 다 쓰지 않고 각각 I, K로 표기함) 내 이름은 자유롭게 써도 좋습니다. 일본과 한국 사이는 표면적으로는 우호적이지만 실제로는 배후에 사악한 힘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에 이런 대비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유감입니다.” (2018.10.19. 미츠다)

 

죠반(常磐) 탄광과 조선인 강제노동에 대하여

 

나가사와 시게루(長澤秀)는 일본대장성 자료를 통해 1939~1945 강제연행조선인은 724,787명이고 그 가운데 탄광으로 동원된 사람이 342,620명이라고 했다.<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관한 역사적 조사(日本人の海外活動に関する歴史的調査)』 제10권>

 

죠반(常磐) 탄광은 이바라기현과 후쿠시마현에 걸쳐 있고 일본 3대 탄광이다. 규모가 작아서 생산량이나 광부 인원수가 전국대비 7%정도의 소규모 탄광이었다. 1931년 죠반탄광의 조선인 광부는 428명이었다.

 

이후 1937년 석탄광업연합회는 상공대신에게 ‘노동력 보충진정서’를 제출했고 그해 말 당국은 각 도부현(都府縣) 지사에게 “내지(일본) 거주 조선인 노농자로서 취업상태에 있지 않는 자가 있는 지방에서는 이를 적극 석탄광산으로 소개할 것”을 지시했다. 그리고 1939년에 죠반탄광이 있는 후쿠시마에 1,500명의 조선인이 새로이 발을 딛게 된다.

 

일본에서는 강제동원이 아니라 자발적인 모집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등 전쟁으로 치달으면서 일본은 석탄, 전기 등의 군수자원을 생산할 노동력을 위해 모집, 관(官)알선, 징용의 방식으로 조선인을 강제 동원했다. 일제는 정책적으로 조선 각 지역마다 할당 인원을 두었고 그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목숨을 건 탈주가 있었다. 징용뿐 아니라 모집, 관(官)알선 까지도 강제동원으로 보는 까닭이다. 죠반탄광에 모두 21,413명의 조선인 광부가 있었는데 특히 1944년에는 침략전쟁 수행을 위한 조선인 강제동원에 의해 5,122명으로 가장 많이 탄광에 들어갔다. 

 

 

정혜경은 그의 책 『조선인 강제연행·강제노동 연구Ⅱ-일본제국과 조선인노무자공출』(선인, 2011)에서 죠반탄광의 조선인 사망자를 305명으로 보고 있다. 특히 44년, 45년에 사망자수가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열악한 작업환경, 교육 및 훈련 미비 등 무리한 작업장 투입, 영양 상태 등이 사망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2명 이상 사망이 집중된 날을 분석한 결과 뇌출혈, 압박사, 전신타박, 두개골절, 장내출혈, 갱내화재로 인한 질식사, 두부골리(頭部骨離: 뼈와 살이 떨어 짐) 등 거의 사고사였으며 4명의 병사(病死)가 있었으나 이들도 탄광업무와 관련이 있는 폐렴, 익사 등이었다. 익사는 죠반탄광이 바다에 연해 있으니 탄광사고 가능성이 있고 탈주 중 사고가 날 수도 있다. 또한 사인 가운데는, 호송 중 목졸림이 있는데 자살 또는 호송 중 탈주에 대한 가해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소하라(磯原) 부근에서 기차에서 뛰어내려 사망한 자도 있다. 이 또한 업무 중 사망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 죠반탄광은 1944년부터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군대와 헌병이 배치되어 감시도 심했고 구타, 폭행도 가혹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탈출률이 1940년 10.4%에서 1943년 22.9%로 늘어난 것만 보더라도 짐작이 간다.

 

또한 정혜경의 조사에 따르면, 305명의 사망자 가운데 4명은 15~16살이고 이들을 포함한 32명(11%)은 20살 이하다. 10대 사망자 가운데 21명이 1944~1945년에 집중적으로 사망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 어린 10대들까지 샅샅이 훑어서 지옥 같은 광산으로 강제 동원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에서는 사고사도 기타에 포함되어 있다. 죠반탄광은 군수공장으로 지정되었기 때문에 1945년 5월 이후 미군의 공습이 심했다. 조선인과 함께 일했던 일본인 여성으로부터 녹취한 증언에 따르면 “공습경보가 울리면 일본인 노동자는 재빨리 피난했지만 조선인은 피할 장소도 없이 불쌍했다.”고 한다. (박경식, 『조선인강제연행기록(朝鮮人强制連行の記錄)』1965, 131쪽, 재인용) 

 

쏟아지는 소이탄 포화 속에서 조선인이 어찌 되었을지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기타에는 이런 이들이 들어있을 수 있다. 박경식은 현지 조사를 통해, 죠반탄광의 노무자들이 맨발로 수일간 굶으며 도망치고, 도망치다가 배고파 죽기도 하고, 기차에서 발각되자 뛰어내려 자살한 자도 있다고 했다. 20살 정도의 조선인이 가혹한 중노동으로 병이 나서 하루를 쉬었다는 이유로 구타당하고 뜨거운 온천물로 학살당했는데도 병사로 처리해버리고 마는 일본은 ‘학살의 땅’이라고 했다.

 

죠반탄광은 해저탄광으로 분류되고 있지 않지만 그곳에서 직접 일한 미츠다 교수의 지인 I 씨의 증언에 따르면 뜨거운 물이 솟아나는 해저탄광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1997년, 죠반탄광역의 온천수에 관한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600~1000m에서 온수를 채취하고 있는데 이 지역 10곳에서 채취된 온천수는 최고 58.6도를 비롯하여 평균 47.13이다. 지상으로 나오기 전 해저갱도에 갓 솟구쳐 나온 온천수의 온도는 훨씬 뜨거웠을 것이다. (심부지하수 수질형성기구에 관한 연구(深部地下水お水質形成機構に関する硏究> 보고서, 지질기초공업주식회사(地質基礎工業株式會社) 1997.3.)

 

주권을 빼앗긴 나라의 국민은 삶의 터전을 잃고 강제로 동원되어 굶주림과 구타 속에서 익숙지 않은 고된 탄광노동을 해야만 했다. 솟구쳐 나오는 뜨거운 물을 퍼내면서 석탄을 캐야 했던 남녀 조선인들에 대한 이야기는 지옥 중에서도 산지옥의 증언이다. 

 

 

모집, 관알선, 징용에 대하여

 

일본은 일본정부의 개입이 없었고 조선인들이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본에 일하러 간 것이라고 주장하며 교과서에서 ‘강제’를 빼겠다고 한다. 나가사와 시게루(長澤秀)는 모집, 관알선, 징용이 자발적인 것이 아니며 일본국가의 정책에 의한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시하 죠반탄광에 대한 조선인광부의 노동과 투쟁(戰時下常磐炭鉱における朝鮮人鑛夫の勞動と鬪い)」,『朝鮮人强制連行論文集成』, 明石書店,1993.)

 

*모집: 모집의 방식을 취하게 된 배경은 석탄 독점자본이 1937년 조선으로부터 노동력 동원을 관계관청에 진정해서 1939년 7월 4일 각의 결정을 거친 뒤 나온 제1회 「노무동원계획」에 1939년도 것으로 조선인 남자 85,000명을 동원한다고 적혀있다. “특히 그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사업에 종사시킬 것”이라고 되어 있다. 곧 조선인 강제연행이 국가의 정책으로 강행된 것이다.

 

법령 면에서는 1939년 7월 29일부 후생, 내무 양차관이 연명하여 지방장관 앞으로 보낸 의명통첩(依命通牒) 「조선인 노무자 내지이주에 관한 건」, 9월 1일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도지사 앞 통첩 「조선인 노무자 모집 및 도항취급요강」등을 발표하면서 일제의 수탈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수많은 조선인들을 일본으로 동원했다. 일제가 패전할 때까지 조선인 강제연행은 국가정책으로서 실시되었고 노동력 수급이 절실했던 일본 중요산업에 대량의 노동력이 조선으로부터 동원되었다. 

 

*관(官)알선: 일본과 미국 간의 전쟁으로 인해 「관알선」 방식 1942년이 되면서 연행수속은 더욱 간략화 되었다.

 

*징용: 조선 내 노동력 수급이 부진하고 조선 내에서 도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기간 내 동원예정수가 미달인 경우가 점차 증가하게 되자, 노동력 충족의 곤란함을 타개할 최후의 수단으로 국민징용령을 조선인에게 적용시켜 일제 석탄 독점자본에게 보낸 것이다. 이렇게 전쟁말기(44년9월 이후)에는 「징용」 방식으로까지 발전했다. 일제의 뜻에 의하여 말 그대로 강제로 일본 국내 각 산업에 동원할 수 있는 법체계가 완성된 것이었다.  <5회로 이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