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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 김종영

《생각을 새긴 조각가 김종영》, 조은정, 나무숲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6)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던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는 <고향의 봄> 동요의 노랫말에 나오는 ‘울긋불긋 꽃대궐’ 이다. 경상남도 창원시 소답동, 지금도 ‘새터마을 소답꽃집’으로 불리는 그 집이다. 한국 조각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한국의 대표적인 추상 조각가, 김종영은 이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태어났다.

 

조은정 작가가 쓴 이 책, 《생각을 새긴 조각가, 김종영》은 한국 조각계의 거목인 김종영의 삶을 보여주는 ‘어린이미술관’ 시리즈 가운데 한 편이다. 이 ‘어린이미술관’ 시리즈는 ‘온 가족이 보는 예술책’답게, 어른과 어린이가 함께 볼 수 있을 정도로 쉽고도 알차게 내용을 담아냈다.

 

 

김종영의 증조부 김영규는 조선이 강제로 합방되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했다. 그리고 1915년, 증손자 김종영이 아버지 김기호와 어머니 이정실의 5남매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린 종영은 집안 어른들이 가르쳐주는 대로 사랑방에서 글씨를 쓰고 난초와 대나무를 그리며 자랐다.

 

열여섯 살이 되던 1930년, 일본인이 세운 학교가 아닌 민족재단에서 세운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한다. 당시 휘문고보에서 미술을 가르치던 서양화가 장발이 솜씨 좋은 김종영을 알아보고 미술반을 권했다. 김종영은 이쾌대, 윤승욱 등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실력을 연마해 나갔다.

 

(p.10)

휘문고보를 졸업한 김종영은 조각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법률을 공부하라고 하였지만, 아버지는 ‘관리나 법관들은 모두 죄를 짓는데 내 자식은 짐승으로 치면 제비인지라 남의 곡식 축내지 않고 깨끗이 살 것’이라며 조각가가 되는 것을 기꺼이 허락하였습니다.

 

이렇듯 운 좋게 예술을 지지해주는 아버지를 둔 그는 도쿄미술학교 조각과에 입학, 유명 조각가인 교수들에게서 성실하게 조각을 배우고, 하숙집에 돌아와서는 마이욜, 브랑쿠시, 자드긴 등의 화집을 보며 새로운 조형세계를 탐구했다.

 

 

1947년, 광복 뒤 서울대 미술대학 학장이 된 스승 장발에게 연락이 왔다. 조각과 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서울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그는 ‘각백(刻伯)’으로 불렸다. 작업할 때 미친 듯이 몰두하면서 학생들에게 참된 예술가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를 보며 장발이 붙인 이름이었다.

 

1952년, 영국의 테이트갤러리에서 실시한 ‘무명 정치수를 위한 기념비’라는 세계적인 조각 공모전에 그의 작품이 당당히 입상하면서 국위를 선양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1953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작품 《새》는 마치 방망이 안에 숨어 있던 새를 끄집어 놓은 듯, 추상적으로 새를 표현하며 우리나라 첫 추상조각을 탄생시켰다.

 

(p.35)

그는 돌의 질감과 나무의 결을 최대한 살려 조각했습니다. 작품에 지나친 기교를 부리려 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단순한 형태의 작품을 눈을 감고 만져보면 미묘한 곡선의 흐름과 표면의 우툴두툴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답니다. 이처럼 돌이나 나무를 억지로 다듬지 않고 재료가 지닌 형태를 거의 그대로 살려 조각을 한 것은 사물의 겉모습보다는 그 안에 담긴 뜻을 소중히 하였기 때문입니다. 김종영은 조각가였으나 자신을 ‘조각하지 않는 조각가’로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평창동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는 ‘김종영미술관’에서는 이를 ‘불각의 미’로 정의한다. 조각하지 않음으로써 조각을 드러내는, 한국미가 잘 드러나는 그의 작품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그에겐 재료의 물성을 그대로 살리며, 최소한의 가공으로 그 사물이 지닌 가장 훌륭한 본성을 뽑아내는 감각이 있었다.

 

 

어떤 이는 그를 선비와 같은 예술가로 평한다. 세상의 영화보다는 예술에 값어치를 두며 살았고, 세상에 이름을 드러내기보다는 외롭게 작업해서다. 사물의 본바탕을 끝없이 탐구하며 사물의 깊은 본성을 드러내기 위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모습이 닮았다.

 

1982년, 위암으로 눈을 감기까지 그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는 《전몰학도충혼탑》, 《3‧1독립선언기념탑》처럼 공적인 기념물도 있지만, 사물을 가장 단순한 형태로 표현한 추상조각이 대부분이다.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보이지 않는 값어치를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고자 했던 김종영. 그가 남긴 작품들은 한국 초상조각의 역사를 볼 수 있는 소중한 자료가 되어 김종영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봄 날씨가 유난히 좋은 요즘, 한 번쯤 김종영미술관을 방문해 그가 표현한 ‘불각의 미’를 찬찬히 감상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