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왕세자, 성균관에 입학하다

《왕세자의 입학식》, 김문식, 문학동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4)

문묘에서 세 왕께 예를 드리니

동궁과 성균관에 봄이 왔구나.

술 단지를 받든 모습이 엄숙하고

자리에 올라 글 읽는 소리가 새롭다.

나이 따라 양보하는 것은 주나라의 선비요

둘러앉아 듣는 이는 한나라의 빈객이라.

나는 직함을 가지고 태만히 한 일이 부끄럽지만

축하를 드리는 소리가 궁궐 안에 가득하네.

 

이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입학식에 관리로 참석했던 이만수(李晩秀)가 쓴 시다. 효명세자의 입학식은 1817년 3월 11일, 성균관 명륜당에서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날 입학식에는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의 관리들과 성균관에 소속된 유생들은 물론이고,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하며” 구경했다.

 

이렇듯 왕세자의 입학례는 조선왕실의 기쁨이자 나라의 ‘경사’였다. 조선왕실의 공식 후계자가 학교에 갈 만큼 장성해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예식이니, 그 위상과 중요함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만하다.

 

김문식의 이 책, 《왕세자의 입학식-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이런 왕세자의 입학식을 세세히 살펴보며 조선왕조가 후계자 교육에 얼마나 열성을 쏟았는지, 입학식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자 했는지 짚어낸다.

 

 

요즘도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자녀는 온 집안의 관심을 받는데, 하물며 아들의 입학이 나라의 중대사일 때는 더 마음이 쓰였을 것이다. 혹시 아들이 입학식에서 실수하지는 않을까, 일찍 입학하면 너무 힘들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명종은 당시 열 살이던 순회세자가 혹시 입학례에서 실수라도 할까 걱정되어 세자를 보필하던 내시 박한종이 세자의 곁에서 수행하며 도와줄 것을 명했지만, 절대 내시를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으로 들일 수 없다는 성균관 유생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뜻을 접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명종은 박한종이 대성전 문밖에서 세자가 미진한 사항이 있으면 일러주게 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지 왕세자를 보필하는 신료들에게 좌우에서 일을 돕고, 뒤에서 모시면서 가르쳐주며, 대성전 밖 계단 위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미진한 일을 말해주라고 당부했다.

 

하긴 지금 기준으로 생각해봐도 기껏 초등학교 1~3학년 정도인 아이가 복잡하고 엄숙한 입학례를 치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혹여나 아들이 실수해 대신들에게 책잡히지나 않을까, 학습 진도가 늦다고 우둔하다고 하지 않을까 염려가 됐던 임금들은 왕세자의 입학 나이와 교재를 두고도 신료들과 줄다리기했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례를 치르고 나면, 왕세자는 아무리 조선왕조의 공식 후계자로 고귀한 신분일지라도 스승에게 학문을 배우는 한 명의 유생이 되었다. 입학식을 치르는 왕세자가 공자에게 술을 올리는 것은 공자로부터 이어진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스승에게 깍듯하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안팎에 보여주는 한 편의 행사였다.

 

(p.109)

왕세자 입학식은 후계자 교육으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궁중에서 편안하게 자라던 왕세자가 성균관이라는 낯선 장소에 가서 복잡한 의식을 거행하고 스승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수업을 받는 것은 여러 가지로 고역이었을 것이다. 조선의 국왕들이 입학식의 절차를 의논하면서도 가능하면 그 시기를 늦추려 하고, 측근 신하를 보내어 보좌하게 했으며, 왕세자도 책상을 사용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아들이 겪게 될 어려움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학문을 숭상하고 스승에게 예를 갖추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왕세자는 입학례 때 책상도 사용할 수 없었다. 책을 바닥에 두면 자세는 자연스럽게 낮아진다. 물론 ‘스승에게 예를 갖추는 것도 좋지만 책상까지 없애야 하는지’에 대한 임금들의 불만은 종종 있었고 실제로 인조는 왕세자의 책상을 만들라고 명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예조에서 이처럼 반대하면서 결국 없던 일이 되었다.

 

입학례의 성대한 의식은 한 나라의 최대 경사입니다. 조종 조에는 이미 내려오는 절목이 있는데, 책상은 박사 앞에 두고 세자는 자리만 깔고 책을 받는 것으로 스승과 생도의 예를 실천합니다. 이는 실로 옛 입학례의 제도를 본받은 것입니다. 책상을 별도로 설치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뒤 효종도 ‘머리를 숙이고 구부린 채 책을 읽는 것이 불편하고, 일반 백성들도 공부할 때는 책상을 사용하며, 책을 책상 위에 올리는 것은 경전을 높이는 것’이라는 나름 탄탄한 논리로 맞섰지만, 결국 또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고 왕세자들은 ‘책상 없는 학생’으로 남아야 했다.

 

조선의 왕세자는 불과 8살에 복잡한 예식을 문제없이 치르고, 어릴 때부터 하루 종일 공부로 채워진 일과를 소화하고, 한 달에 두 번은 ‘회강’이라 하여 아버지와 대신들 앞에서 그동안 공부한 것을 보여줘야 하는 ‘극한직업’이었다. 말 그대로 ‘왕관을 원하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에 가까운 혹독한 후계자 교육이었다.

 

그런 교육을 거친 임금이 반드시 성군이 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최대한의 수련과 교육을 통해 ‘이상적인 군주’를 만들려 했던 조선왕조의 열성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조선왕조가 500여 년 동안 이어진 배경에는 이런 후계자 교육이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그 지난한 후계자 교육의 본격적인 시작, 입학례. 조선 왕세자의 입학식은 그 누구보다 특별했다. 개인의 인생에서도, 왕실 가족에게도, 신하와 백성들에게도 중요한 의식이었을 ‘입학례’를 생생하게 만나볼 수 있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