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간송(澗松).
산골에 흐르는 물, 그리고 푸른 소나무를 뜻하는 이 말은 어느새 우리 문화의 대명사가 되었다. 간송은 물려받은 큰 재산으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는 데 열과 성을 다한 전형필 선생의 호다. 오늘날 국보급 문화재를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도, 우리 미술사에 긍지를 가질 수 있는 것도 간송이 그 모든 것을 지켜내지 않았더라면 요원했을 일이다.
최석조가 쓴 이 책 《조선의 백만장자 간송 전형필, 문화로 나라를 지키다》는 ‘간송미술관’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진 간송 전형필의 일생을 조곤조곤 들려준다. 간송에 막 관심을 가진 청소년이 읽기에도 좋다. 미술 교과서에서 보았던 수많은 그림과 도자기가 알고 보면 간송의 엄청난 노력으로 이 땅에 남아있음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간송 전형필은 1906년 서울에서 아버지 전영기, 어머니 밀양 박씨 사이에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큰형 형설은 벌써 열다섯이었으니, 정말 늦둥이였던 셈이다. 아들이 귀한 집안이었기에 형필은 자식이 없던 작은아버지 전명기의 양자로 들어갔고, 온 가족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선대 할아버지 때부터 배오개 장터(지금의 종로)에서 장사한 그의 집안은 나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 만큼 부자였다. 서울은 물론 경기도, 황해도, 충청도에 있는 땅에서 한 해 수만 석이 나왔다. 천석꾼도 드물던 시대에 몇만 석을 거두는, 말하자면 재벌가였다.
어린 시절은 대체로 행복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 양아버지 전명기가 세상을 떠나고 1919년, 형 전형설마저 불과 스물아홉 살의 나이로 갑작스레 세상을 등지며 깊은 슬픔에 빠지기도 했다. 1921년에는 휘문고보에 입학해 민족의식이 투철했던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으며 민족의식을 키웠다.
형필의 외사촌 형인 월탄 박종화도 역사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주었다. 역사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형필은 대학에서 문학이나 역사를 공부하고 싶었지만, 변호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1926년 와세다대 법과에 입학했다.
형필은 방학을 맞아 조선으로 돌아올 때마다 우리나라 첫 서양화가이자 휘문고보 미술 선생님이었던 스승 고희동을 꼭 찾아뵈었다.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는 제자에게 그는 우리 문화를 오래 연구하여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는 위창 오세창을 소개해주었다.
이때부터 오세창에게 하나둘, 문화재를 보는 안목을 전수하며 문화재에 눈을 뜬 그는 열심히 공부했다. 그에게 ‘간송’이라는 호를 지어준 이도 오세창이었다. 그는 산골 물처럼 맑고 깨끗하고 소나무처럼 늘 푸르게 살라는 뜻으로 이 호를 지어주었고, 형필은 그 뜻에 따라 살아가려 애썼다.
(p.46-47)
“물려받은 땅에서 나는 쌀, 장사해서 팔면 더 큰 돈을 모을 수 있지 않겠나.”
“선생님도 참, 말씀드렸잖습니까. 우리 문화재 지키는 데 쓰겠다고. 많은 재산, 무덤에 가져가 봐야 무슨 소용입니까? 일본에 맞서 우리 문화재를 지켜내겠습니다.”
간송이 이야기를 마치자 오세창은 붓과 벼루를 끌어다가 하얀 종이 위에 천천히 네 글자를 써 내려갔습니다.
“문화보국(文化保國)?”
“그래, 문화로 나라를 지켜낸다는 뜻이네.”
“제가 문화재를 수집하려는 뜻과 한 치의 다름도 없는 말입니다. 평생, 이 마음으로 할 일을 해나가겠습니다.”
이때 뜻을 세우고, 평생 변함없는 마음으로 간송이 지켜낸 문화재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영국인 개스비에게 사들인 청자 컬렉션, 청자상감운학무늬매병, 그리고 무엇보다 《훈민정음해례본》! 간송은 《훈민정음해례본》을 그 어떤 보물보다 귀하게 여기며 항상 품에 넣고 다녔다.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난 갈 때도 다른 문화재는 기차에 실어 보냈지만, 《훈민정음해례본》만큼은 직접 가지고 다니며 잘 때도 머리맡에 두고 잤다. 이렇게 간송이 애지중지 지켜낸 우리 겨레의 유산은 광복 뒤에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민족의 긍지로 남았다.
교육에도 뜻을 두어 보성학교 운영에 힘썼지만, 학교 운영과 문화재 유지에 많은 자산이 소요되면서 점차 재정이 어려워졌다. 재정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내색하지 않고 《고고미술》이라는 책을 정기적으로 펴내며 한국문화를 알리는 일에 열중했다. 그러는 사이 점차 건강이 나빠져 1962년 1월, 불과 쉰일곱 살의 나이로 안타깝게 숨을 거두었다.
(맺음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쉽게 말합니다.
“나도 돈만 있으면 그렇게 했겠다.”
이건 재산이 많다고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간송은 우리 문화재 지킴이라는 힘든 외길을 신념을 가지고 평생 우직하게 걸었지요.
“뚜벅뚜벅.”
간송의 걸음은 세상을 빛낸 큰 발걸음이었습니다.
그렇다. 돈이 있어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끝내 하지 않는다. 할 수도 없다. 값진 보배를 보는 안목은 쉬이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간송은 부단한 노력으로 안목, 재력, 의지 세 박자를 갖춘 불세출의 수집가가 되었다.
만약 그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명품급 문화유산은 죄다 일본과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우리 미술사는 참으로 허전했을 것이다. 간송은 이런 문화유산을 수집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보화각’을 세워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우리 작품을 볼 수 있는 귀한 경험을 선물했다.
돈이 있다고 아무나 할 수 없는,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했던 일을 그 누구보다 훌륭하게 해낸 간송 전형필. 그가 평생을 바쳐 모은 문화유산이 헛되지 않도록, 우리 모두 관심을 기울여 ‘문화보국’의 정신을 이어 나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