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지난 9월 22일, 나는 평창군 용평면 장평리를 운전하면서 지나다가 평창군청에서 내건 커다란 펼침막을 보았다. 제목이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어서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사진을 찍어왔다.
‘플로깅 챌린지’? 해석이 되지 않는다. 챌린지는 도전(challenge)을 뜻하는 것 같은데 플로깅은 무슨 말인가? 사진을 확대하여 자세히 보니 현수막 오른쪽 위에 플로깅에 대한 설명이 작은 글씨로 쓰여 있다. “Plogging [plocka up + jogging], 운동하며 쓰레기 줍는 일석이조 운동법”라고 말이다.
그런데 궁금증은 여전하다. plocka는 또 무슨 뜻인가? 손말틀로 다음사전에서 찾아보니 pooka, plucky, plica 등의 단어는 있어도 plocka라는 단어는 없다. 프랑스어 사전과 스페인어 사전을 찾아보아도 그런 단어는 없다. 국적 불명의 신기한 단어다.
펼침막의 왼쪽 위 구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굿-매너 문화시민운동 ”
굿-매너는 예절이라는 뜻 같은데, 아마도 <good manner>라는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한글로 표기한 것 같다. 계속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펼침막의 아래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대상: 평창군 거주자 (워크온 평창군 커뮤니티 가입자)”
‘워크온’은 무슨 뜻이고 ‘커뮤니티’는 또 뭐란 말인가? 점입가경이다. 이러한 시민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에게는 선물을 주는 모양인데, 현수막의 오른쪽 아래 구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챌린지 선물
2024 강원청소년올림픽 마스코트
뭉초(MOONGCHO)
키링, 인형 증정
마스코트는 그렇다 치고, ‘뭉초’는 무엇이고, ‘키링’은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까지 추적하다가 “해도 해도 너무한다”라는 생각이 격해지면서 욕이 튀어나오고 말았다. 아이고, 나는 수양이 부족한 사람인가 보다.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든 주시경(1876~1914) 선생은 일찍이 “한 나라가 잘되고 못 되는 열쇠는 그 나라의 국어를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주시경의 제자인 최현배 선생은 “세계인이 되기 전에 먼저 조선인이 되라. 조선을 구함으로써 세계를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최현배 선생은 한글을 마음대로 쓸 수 없었던 험악한 일제강점기에 “한글이 목숨”이라는 붓글씨를 《금서집》이라는 책(방명록)에 쓰는 기개를 보여주셨다.
우리 겨레의 정체성을 가장 잘 나타내는 첫 번째 요소는 우리가 쓰는 말글에 있다. 우리가 중국 대륙에 붙어 있는 작은 한반도에서 2,000년 동안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우리 말을 잘 지켜왔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2,000여년 동안 세계 각지에 흩어져 핍박받으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자기 민족의 말을 잊지 않고 지켜왔기 때문이다.
한글이 가장 과학적이며 배우기 쉬운 글자인 것은 세계가 다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런 한글이 요즘 영어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것 같아서 세종대왕을 존경하는 필자로서 매우 안타깝다. 최근에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방탄소년단(BTS)의 팬들(아미)이 한글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한글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한다. 만일 그들이 한국에 와서 아파트 이름을 보면 어리둥절할 것 같다.
2000년대 이전에 지은 아파트 이름들을 보면 순수 우리말로서, (예를 들면 개나리 아파트, 진달래 아파트, 청실 아파트, 장미 아파트, 무지개 아파트 등등) 정겨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요즘 지은 아파트 이름들을 보면, 무슨 뜻인지 난해하기만 하다. 목동센트럴아이파크위브 아파트, 빛가람대방엘리움로얄카운티 아파트 같은 이름을 외울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래미안개포루체하임 아파트 이름에서 루체는 이탈리아 말로 ‘빛’이라는 뜻이며 하임은 독일어로서 ‘집’이라는 뜻이라는 설명을 듣다가 한숨만 나오고 말았다.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고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정부에서는 1945년부터 10월 9일을 한글날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학교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가르치고 있다. 학부모들은 유치원에 다니는 자녀에게 영어학원에 다니도록 난리가 아니다. 우리 손녀들은 영어 이름까지 가지고 있다. 초ㆍ중ㆍ고에서 영어 과외는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되었다. 방송에 출연하는 젊은 연예인들은 멀쩡한 한글을 영어로 바꾸어 말한다. 관청에서 영어를 섞어 쓰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고 선진국의 진입 조건이라고 여기는 것 같다.
왜 이런 한글 오염 현상이 나타났을까?
두 가지 원인을 생각해 보았다. 첫째는 우리나라 각 분야(학계, 관계, 정계, 재계 등등)의 지도층에 포진하고 있는 미국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 자제하지 않고 은연중에 영어 단어를 많이 쓰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이 이들을 따라 영어 단어를 알게 되고, 또 영어 단어를 쓰면 유식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부인ㆍ각시ㆍ마누라 또는 아내라는 우리말이 미국 유학생들이 즐겨 쓰는 와이프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재미있는 현상은, 내가 사는 평창군 봉평면 우리 동네에는 대부분 토박이가 사는데, 부인을 와이프라고 부르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그러나 내 대학동창 모임에 가면 부인이라는 단어를 쓰는 사람이 없고, 모두 다 와이프라고 한다.
둘째는 정치인 특히 국정의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한글에 관한 생각이 문제다. 대통령 중심제인 우리나라 권력 구조에서 대통령의 생각과 발언의 파급력은 너무나도 막강하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는 국정의 지표가 된다. 각 부처 장관과 관리들은 대통령의 말 한마디를 옛날 조선 왕조에서 왕명 받들 듯이 한다.
아래 두 기사를 살펴 보자.
<2008. 3. 15.자 시사IN 기사>
지난해 10월 부산 학부모 간담회에서 후보 신분이던 이 대통령은 ”초등학교 때부터 국어와 국사 등 일부 과목을 영어로 강의하면 어학연수를 따로 받지 않아도 된다“라고 발언했다. 지난 1월 31일에는 ‘어뢴지’로 대변되는 이경숙 인수위원장의 영어 몰입 교육 정책을 반대하는 국민에게 ”국가 미래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지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다. 방향은 인수위가 맞다“라고 말했다.
<2022.6.10.자 연합뉴스 보도>
윤 대통령은 용산 공원 개방 첫날인 이날 용산 집무실 주변의 시민공원 조성 계획도 직접 소개했다. 윤대통령은 “미군 부지를 모두 돌려받으면 센트럴파크보다 더 큰 공원이 된다”면서 “공원 주변에 국가를 위해 희생된 분들을 위한 작은 동상들을 세우고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로 이름을 지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영어로 내셔널 메모리얼 파크라고 하면 멋있는데 국립추모공원이라고 하면 멋이 없어서 우리나라 이름으로는 무엇으로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명칭에 대한 고민도 드러냈다고 한다.
오는 10월 9일은 제577돌 한글날이다. 이번 한글날에는 아래와 같은 기사를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글날 담화를 발표하여, 앞으로 정부의 모든 공문서에서 영어를 쓰지 말고 한글로 표현하라고 지시했다. 또한 무슨 말인지 알기 어려운 아파트 이름과 건물 이름은 모두 한글로 바꾸도록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에게 특별 지시를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