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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서울 은평구 진관사의 한글길

유서 깊은 한글문화동네 걸어보기를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1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서울 은평구 진관동, 내가 사는 동네다. 요즘은 도로이름을 주소로 쓰지만 행정구역 이름으로 진관동이 엄연히 살아있다. 진관동이란 이름은 북한산 자락에 있는 진관사라는 오래된 절 이름에서 비롯됐다. 진관사는 원래 이름이 없는 작은 암자였으나 고려 왕조 초기 천추태후에 의해 목숨이 위태로웠던 현종이 이 절에 숨어들어 진관스님의 보호로 목숨을 건진 뒤에 임금이 되고 나서 진관스님을 위해 절을 키우고 절 이름도 스님의 법호를 그대로 쓰도록 해 큰 절이 되었다.

 

진관사는 수륙재를 올리는 절이다. 태조 이성계가 고려왕조를 무너트리고 조선을 개국한 뒤에 그 과정에서 숨진 많은 영혼을 천도해 주려고 집권 4년째인 1395년 수륙재(水陸齋)를 처음 지내고는 이곳에 수륙사(水陸社)라는 사당을 개설해 왕실 주관으로 수륙재를 봉행하도록 해 그것이 성종 때까지 이어졌다. 그러고는 잊히다가 1970년대에 진관이란 동명의 스님에 의해 수륙재만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복원돼 2013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해마다 가을에 진관사에서는 수륙재가 거행된다. 이 의식을 올리는 목적은 죽은 뒤에 윤회의 업보를 받아 물과 땅에 떠돌아다니는 영혼들을 불보살(佛菩薩)의 큰 자비에 의지하여 성불케 하고 왕실의 안녕과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그것을 왕실에서 주관했기에 국행(國行)수륙재라는 이름을 갖고 있다. 올해는 수륙재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10년이 되는 해로서, 지난 9월 3일 입재식을 가졌고 일요일마다 재를 올려 현재는 5재를 마친 상태이다. 10월 21일과 22일 이틀 동안 마지막 칠재를 봉행하면 끝이 나게 된다.

 

이 수륙재 행사 기간에 한글날이 들어있다. 올가을 한글날을 앞두고 나는 진관사를 찾았다. 그런데 절 입구에서부터 특별한 발견이 이어졌다. 절 앞에는 한옥마을이 있고 마을 끝, 절 입구 쪽에는 한옥마을 안내소 역할을 하는 2층으로 된 신 한옥의 1층에 '은평한옥마을 어울림터'라는 한글 글씨체 간판이 보인다.

 

 

 

조금 더 올라가면 절 바로 입구에 화장실이 있다. 그런데 화장실 간판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비움터'다. 우리는 화장실을 보통 'WC, Toilet, 화장실, 해우소' 등으로 부르는데, '비움터'라는 말이 무척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 앞 주차장 이름은 '차쉼터'이다. 그 앞에 진관사에서 운영하는 한문화 체험관은 지하 1층부터 3층까지 '흙다움, 물다음, 빛다움, 아름다움'으로 층별 이름을 지어 한결같이 토박이답고 정겹게 느껴진다. 조금 더 올라가니 '한글길' 안내돌이 보이고 진관사 위쪽으로 길이 뻗어있다. 글씨체는 훈민정음의 판본체를 바탕으로 한 네모난 글씨체인데 이런 글씨체는 '은평글꼴' 이고 이를 다른 이름으로 '은평구 사가독서체'라고 부른다고 한다. 사가독서란 말은 무슨 말인가?

 

이 진관사는 세종 초기 집현전의 우수한 인재들이 유급휴가를 명 받아 독서를 한 곳이다. 세종 8년(1426) 임금은 집현전의 학자들에게 “(그대들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지만 각각 직무로 인해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를 나타낼 것”을 지시하였다. 이러한 유급 독서제도를 사가독서( 賜暇讀書)라고 하는데 맨 처음에는 집에서 하라고 하다가 절에 보내어 거기서 하라고 했다.

 

세종 24년인 1442년에 임금은 신숙주(申叔舟) 등 6명에게 진관사(津寬寺)에서 지내면서 글을 읽게 하였다. 그래서 혹 여기서 한글, 곧 훈민정음을 연구한 것이 아니냐는 속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시기에는 한글창제를 반대하던 세력의 견제가 심했었고 명나라의 눈치도 봐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유생들의 눈에 띄지 않는 이런 한적한 진관사에 비밀스러운 연구실을 만들어 거기에서 글자를 연구하도록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그런 속설에 따라 KBS 드라마 <대왕세종> 82회에서는 그때 세종대왕이 진관사에 와서 한글연구를 격려했을 것이라는 암시장면을 넣기도 했다. 또 한글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는 신미대사의 역할이 갑자기 부각되기도 했다.

 

 

신미(信眉)는 조선 초기의 스님으로서 속명은 김수성(金守省)인데 신미대사의 가문인 영산 김씨의 족보에는 ‘수성이 집현원학사로서 세종으로부터 총애를 받았다(守省以集賢院學士得寵於世宗)’라는 문구가 나온다고 하는데, 불교쪽에서는 이 기록이 신미의 활동을 증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점 등을 근거로 불교계에서는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이바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해 한글날에 양산 통도사에서 열린 특별학술대회에서 고려대 정광 명예교수는 “세종은 우리말을 완성해 표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꿈꿨으며 신미대사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우리말을 표기했고 비로소 언문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라며 “신미대사는 범어(梵語)와 실담(悉曇)*에 능통했고 고대인도의 범자와 성명기론을 새 문자 제정에 원용하여 문자 체계를 정비했다”라고 말했다.

 

* 실담은 산스크리트어, 곧 범어를 표기하는 문자 및 그 자음과 자의(字義)로서, 고대 인도의 브라흐미문자를 바탕으로 굽타왕조 사대에 굽타문자로 발달하였고 그것이 6, 7세기 무렵 불교의 동아시아 전파와 더불어 중국과 한국에 전해졌다고 한다. 이 문자체계에는 모음 12자, 자음 35자, 합계 47자로 되어 있어서 이것으로 산스크리트어를 표기했다고 한다.​

 

이보다 앞서 2002년에는 훈민정음 창제 이전인 1438년에 간행된 《원각선종석보》(圓覺禪宗釋譜)를 발견했다는 발표도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2014년 소설가 정찬주는 훈민정음을 신미가 주도했다는 내용의 소설 《천강에 비친 달》을 발표했다. 2019년에는 비슷한 내용의 영화 《나랏말싸미》가 개봉되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 등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고 신미 대사가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했다는 증거도 없다.

 

《원각선종석보》는 15세기 당시의 한국어 어법과 표기와 들어맞지 않기 때문에 후대에 만든 위작으로 추정되었고, 영화는 엄연히 세종 혼자서 각고의 노력으로 창안했다는 사실을 부정한다는 각계의 비판에 따라 길게 상영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진관사에 사가독서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진관사 입구에는 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정의공주와 함께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협력한 화의군(和義君) 이영(李瓔, 1425~1489)의 무덤이 있다. 진관사 독서당에서 훈민정음 연구가 이루어졌는지는 기록이 없어 불투명하지만, 훈민정음 창제에 이런저런 인연과 개연성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를 근거로 진관사에서는 당시의 독서당을 다시 복원하자는 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편 은평구청에서도 이 일대를 세계기록유산 훈민정음 한글테마공원으로 지정하고 조성하겠다는 사업계획을 세워 2019년에 문화체육관광부에 신청했으나 승인을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진관동에는 국립한국문학관이 11월에 착공을 앞두고 있고 그 밑에 예술인 마을이, 그 옆에는 한국고전번역원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다. 자연스럽게 한글 관련 역사성이 두드러지는 곳이다.

 

그러기에 김미경 은평구청장은 진관사, 또 마을 주민자치위원회 대표들과 함께 한옥마을과 진관사 일대를 한글특화지구로 만들기 위해 간판을 토박이말로 바꾸는 사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 일대의 길을 힌글길로 하고 그 이름을 크게 새겨놓았다. 진관사에는 절 안 큰법당 앞쪽에 안내판을 세우고 여기에 조선 시대 한글 창제를 위해 사용되었던 비밀연구소인 독서당이 있었던 곳이라고 썼다. 공식 기록에는 없지만 이곳의 독서당이 한글 연구에 활용됐다는 뜻을 담고 있다.

 

 

사가독서터 비석은 주민자치회에서 서울시에 건의하여 지난 2021년에 세운 것이다. 그 이후 자연스럽게 한글길이 절 입구인 해탈문부터 북한산 자락까지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쓰이는 글씨체는 은평구와 업무협약을 맺은 세종국어문화원이 훈민정음과 동국정운 한글 글꼴을 응용해서 만든 것이기에 은평글꼴, 일명 사가독서꼴이란 이름을 붙여 개발한 것이고 '비움터, 차쉼터'라는 말도 은평구와 세종국어문화원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든 말이라고 한다.

 

그런저런 것을 알고서 은평 한옥마을을 찾고 진관사에 들르면 이 일대에 그러니 이곳에 사는 주민으로서는 은평구 진관동이 정말로 한글 특화공원, 또는 특화 지구로 확장 발전되었으면 한다. 곧 다음달에 국립문학관이 드디어 착공된다. 이 문학관이 문을 열면 이 일대는 이곳은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세계에 알리는 유서 깊은 한글문화동네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꼭 한글날이 아니더라도 올해 시간 되면 한옥마을과 진관사 일대를 걸어보라고 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