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10)
먼 길을 걷고 돌아와 천천히 매일 서귀포를 걷는다.
길을 내고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길을 걸으며 행복했으면 좋겠다.
길 위의 모래 한 알, 길섶에 사는 풀잎처럼, 풀꽃처럼
소소한 그 길이 소중했으면 좋겠다.
그것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을 알았으면 좋겠다.
제주 ‘올레길’.
전국에 올레 열풍을 불러온 ‘제주올레’의 창시자 서명숙이 지은 이 책, 《서귀포를 아시나요》는 서귀포에서 나고 자란 그녀의 추억을 가득 담고 있다. ‘올레’는 길에서 집까지 연결된 좁은 길을 뜻하는 제주 방언으로, 그녀가 구석구석 길을 닦고 빛을 내기 시작하며 전 세계에 알려졌다.
늘 거기에 있었던 ‘올레’, 그러나 그것을 발견한 것은 그녀만의 독특한 감성이었다. 그녀는 어릴 때 무심히 보던 현무암조차 수십 년이 흐르고 보니 너무나 멋진 ‘신의 붓질’로 느껴졌다고 고백한다. 현무암의 빛깔이 비할 데 없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나 역시 이러한 경탄에 깊이 공감했다.
(p.37)
제주에 살면 살수록 제주의 풍경을 완성하는 마지막 신의 붓질을 현무암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다. 검은 현무암은 제주에 피고 지는 그 모든 꽃과 나무와 덩굴 식물들의 색깔과 모양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다. 무채색의 힘으로 모든 색깔을 더 생생하게 만드는 것이다. 영화로 치면 흥행을 책임지는, 색채계의 신스틸러라고나 할까.
지은이는 ‘서명숙상회’ 집 딸이었다. 딸 사랑이 지극했던 어머니는 상회 이름에 딸의 이름을 넣었다. 그리고 주변 상인들에게 항상 인심 좋게 베풀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은덕을 올레길을 내며 톡톡히 보았다.
서울에서 언론인으로 일하다 고향으로 돌아가 제주올레 1코스에서 11코스까지, 성산에서 대정까지의 길을 개척하는 동안 어머니에게서 은혜를 입었다는 사람들을 숱하게 만난 것이다. 당시 서명숙상회에서 일하던 점원도 있었고, 단골 거래처 주인도 있었고, 노점상을 하다가 고기국수집을 차린 이도 있었다.
책에 실린 4.3 사건과 남영호 사건은 충격적이다. 아름다운 관광지로만 알려진 정방폭포가 실은 4.3사건 희생자들이 총살당해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현장이라는 것. 서복공원이 조성된 정방폭포 인근은 차마 다시 떠올릴 수 없는 처절한 비명이 서린 곳이다.
(p.170)
신문에 언급됐듯이 250명 가까운 주민들이 서복공원 야외공연장 근처 소남머리 절벽에서 총살을 당해 그 푸르른 바다로 떨어져서 다시는 가족들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가족들은 빨갱이라는 낙인이 두려운 나머지 시신을 수습할 엄두도 낼 수가 없었다.
남영호 사건은 또 어떤가. 1970년 일어난 이 비극은 세월호 사고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한국 역사상 최악의 해상사고로 기록된 사건이었다. 그때 지은이는 중학교 1학년이었고, 주변에 가족을 잃은 친구들과 이웃들의 아픔을 고스란히 지켜보았다.
(p.301)
1970년 12월 14일 오후 4시 제주 서귀포항에서 출발해 성산포항을 거쳐 338명의 승객과 543톤의 화물을 싣고 부산항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15일 새벽 2시 5분경 여수 소리도 앞바다에서 침몰한 사건이다. 건국 이래 해상참사 중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낸 최악의 사고로 323명이 사망하고 겨우 15명만 구조되었다.
지은이는 이 사고를 ‘제주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지지 않는 또 하나의 세월호’라고 하며, 하마터면 남영호의 희생자가 될 뻔했으나 그때 걸렸던 지독한 감기몸살로 겨우 재앙을 피해간 어머니, 그리고 이 책을 쓰며 다시 만난 피해자 친구의 증언을 들으며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삼천 배를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이처럼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만큼 곳곳에 상흔이 있는 섬, 그곳이 바로 제주도다. 무언가를 진정 이해하고자 한다면, 아름다움 뒤에 숨겨진 아픔까지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제주를 깊이 있게 알아갈 수 있는 훌륭한 길잡이다.
제주의 올레길을 갈고 닦으며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지은이의 안내와 함께 서귀포 구석구석을 다니다 보면, 어느새 서귀포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럴 때는 훌쩍, 바람처럼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서귀포를 아시나요》, 서명숙, 마음의숲, 15,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