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진경 문화평론가] 거문고 연주자 박은혜가 계묘년이 저물어 가는 2023년 12월 27일 밤 8시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다섯 번째 거문고 독주회를 열었다.
중앙대학교 이형환 교수의 사회로 문을 연 거문고 독주회는 전통을 바탕으로 한 연주곡들로 가득하였다. 신쾌동류 거문고 풍류 상현도드리와 하현도드리에 이어 거문고 독주곡의 백미인 신쾌동류 짧은 산조가 연주되었다. 이수자의 길을 걷고 있는 박은혜 연주자의 거문고연주는 관객들의 추임새를 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필자가 숱한 거문고 독주회 가운데 박은혜 연주자의 공연을 보고 글을 쓰게 된 것은 산조 때문만은 아니다. 거문고 산조 연주 이후 소개되는 곡들이 기존의 독주회에서 보지 못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 거문고 창작곡인 ‘행복한 우리 살림ㆍ첫봉화’가 눈에 띄었다. 개방현을 우렁차게 울리며 박력있고 화려하게 연주하는 것이 한국의 창작곡들과 다르다. 오른손으로 줄을 뜨는 연주법이 인상에 남는다.
북한은 1960년대부터 악기 개량사업이 시작되었다. 이때 거문고는 개량되지 못해 거문고가 단절되었다. 그래서 현재 남아있는 북한의 거문고 창작곡은 모두 9곡이며 가야금 연주자들이 부전공으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9곡을 박은혜 연주자가 모두 연주했기에 그녀는 단순히 거문고의 전통을 잇는 것뿐만 아니라 그녀만의 색으로 거문고의 세계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수동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국악기 전통 독주회는 산조를 중심으로 진행하였고 거기에 정악 곡을 더하는 것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규칙이 되었다.
길지 않은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산조가 전통국악기들 독주회의 중요한 소재가 된 것은 조선 후기부터 근대에 이를 때까지 최고의 인기곡이었고 공력이 있지 않으면 한바탕을 탈 수 없는 고도의 기량이 필요한 곡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독주회를 한다고 하면 정악 몇 곡과 산조 한바탕을 하겠지 싶어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가게 된다.
기가 막히게 잘 해내지 않으면 추임새를 끌어낼 수 없는 탓에 자칫하면 지루하고 뻔한 공연이 되고 만다. 그만큼 어려운 곡인데도 공력 없이 독주회를 하는 자들이 태반이다.
그런데 박은혜 연주자는 추임새를 끌어내는 산조 연주로 독주회에 보여줘야 할 모든 기량을 뽐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북한의 창작곡을 연주했고, 연이어 연주된 가야금 병창과 거문고 병창 2곡을 통해 그녀만의 고한 철학과 얼로 독주회 연주곡들을 구성하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가야금병창은 대학교에 전공이 있고 무형문화재로도 보존이 되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거문고 병창을 하는 자들은 몇 되지 않으며 그것도 공연으로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가야금 병창과 함께 노래하는 박은혜 연주자의 거문고 병창을 들으면서 전통에 대한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다.
그녀의 거문고 세계는 바로 이러한 전통의 새로운 발견과 가능성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열정일 것이다. 늘상 하던 안전한 길로 가지 않고, 거문고가 할 수 있는 다양한 전통의 소재들을 관객들에게 소개하며 거문고의 역량을 아낌없이 선보인 것이다.
그녀가 연주한 곡들이 독주회에서는 생소한 소재지만, 전통곡들을 현대의 감성으로 재창작한 것들이다. 그래서 난해하지 않았고 한국의 정서에 공감하며 관객들과 추임새로 함께 놀 수 있었다. 이것이 거문고가 전통의 소재들에서 머무르지 않고 올바르게 창작, 연주하는 좋은 사례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는 박은혜 연주자의 거문고 세계가 후학들에게 잘 전해져 관객들과 다양하게 만날 가교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믿게 해주는 공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