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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편지

덕률풍 소리가 울리면 절을 세 번 하고 받아

[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4907]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천감리서 주사 조광희가 덕률풍으로 전해 오기를 영국군함 5척, 러시아군함 1척, 미국군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는데, 육지로 상륙하였던 영국 병사가 금일 아침 10시에 승선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외무아문일기》 1898년 1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덕률풍(德律風)’이란 전화기의 영어 말인 ‘텔레폰’을 한자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덕진풍(德眞風)’, ‘다리풍(爹釐風)’ 등과 어화통(語話筒), 전어통(전어통) 등으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에 보면 1895년 통신국의 사무를 전하면서 일본서 만든 말인 “전화(電話)”를 썼고, 이후 이 말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위 기록은 전화기를 처음 사용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이 가져온 것이라 하지요.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뒤인 1896년에야 덕수궁 안에 전화기가 설치됐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와 친일파로 나뉘어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임금이 내린 지시도 왜곡하는 것이 보통이었기 때문에 신하들을 극도로 불신하면서 칙령도 덕률풍으로 내렸습니다.

 

그런데 고종이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는 신하는 임금을 직접 뵈었을 때처럼 극진한 예를 다했지요. 먼저 전화벨이 울리면 신하는 전화기가 있는 방향으로 절을 세 번 하고 전화를 받아 임금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말소리로만 들리지만, 전화기를 임금으로 생각하고 삼배(三拜)의 예를 다했던 것이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전화는 철선(鐵線)을 쓴 탓에 감도가 아주 나빠서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전화기가 있는 방 안 사람들은 모두 일손도 멈추고 숨을 죽여야만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