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2022년에 《한일 근대인물 기행》 책을 냈던 고교동기 박경민이 이번에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라는 책을 냈습니다. 《한일 근대인물 기행》이 근대를 살다 간 한일의 대표적인 인물 39인의 삶을 통하여 한일 근대사를 들여다본 것이라면, 이번에 낸 책 《일본의 근대사 왜곡은 언제 시작되는가》는 고종 시대의 두 사건을 통하여 그 당시 일제의 치밀한 조선 침략을 들여다본 책입니다. 경술국치 때까지 일제의 조선 침략 사건이 많겠지만, 경민이는 그 가운데에서도 강화도 조약으로 조선이 일본에 의해 강제로 개항하게 된 당시의 경위를 1편으로 다루었고, 청일전쟁 직전에 일제가 벌인 교활한 침략을 2편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표지 그림을 보니 높은 파도 아래에 고종이 천진난만하게 앉아있는 것이 파도가 금방이라도 고종을 집어삼킬 듯합니다. 이는 고교동기 신일용이 그려준 것으로, 일용이는 일본의 풍속화가 가츠시카 호쿠사이(1760 ~ 1849)의 대표작품 후가쿠 36경 가운데 하나인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를 토대로 그렸습니다. 후가쿠 36경은 다양한 지점에서 후지산을 놓고 그린 그림입니다. 일용이는 일제에 의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인천감리서 주사 조광희가 덕률풍으로 전해 오기를 영국군함 5척, 러시아군함 1척, 미국군함 1척이 닻을 내리고 머물러 있었는데, 육지로 상륙하였던 영국 병사가 금일 아침 10시에 승선하여 되돌아갔다고 한다.” 이는 《외무아문일기》 1898년 1월 24일 치 기록입니다. 여기서 ‘덕률풍(德律風)’이란 전화기의 영어 말인 ‘텔레폰’을 한자식으로 바꾼 것입니다. ‘덕진풍(德眞風)’, ‘다리풍(爹釐風)’ 등과 어화통(語話筒), 전어통(전어통) 등으로도 불렀다고 합니다. 그 뒤 《고종실록》 33권, 고종 32년에 보면 1895년 통신국의 사무를 전하면서 일본서 만든 말인 “전화(電話)”를 썼고, 이후 이 말로 굳어졌습니다. 따라서 위 기록은 전화기를 처음 사용한 기록으로 보입니다. 조선에 처음 들어온 전화기는 1882년 청나라에 전기 기술을 배우러 갔던 유학생 ‘상운’이 가져온 것이라 하지요. 이로부터 14년이 흐른 뒤인 1896년에야 덕수궁 안에 전화기가 설치됐습니다. 고종은 당시 이 전화를 적극 이용했는데 특히 동구릉에 있는 대비 조씨의 무덤에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해 문안을 드릴 정도였지요. 또 고종은 신하들이 친러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