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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빛나는 조선의 천문학 이은 과학자 이원철

《우리 하늘을 연구한 과학자 이원철》, 유영소, 마음이음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천문학자!

흔히 ‘인문(人文)’이 인간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무늬를 뜻한다면, 천문(天文)은 별들의 움직임이 만들어 내는 무늬를 궁구하는 학문이다. 별을 사랑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일이다. 이 책의 주인공, 암울했던 식민지 하늘을 밝힌 과학자 이원철은 별을 사랑한 청년이었다.

 

거의 모든 이들에게 퍽 생소할 이름이지만, 이원철은 일제 강점기 때 독수리자리 에타별이 맥동 변광성임을 증명하여 세계 천문학계에 이름을 떨친 천문학자다. 유영소가 쓴 이 책, 《우리 하늘을 연구한 과학자 이원철》은 이원철의 생애와 업적을 알기 쉽게 조곤조곤 풀어낸다.

 

 

그가 올려다본 하늘, 그것은 조선의 하늘이었다. 나라를 빼앗긴 현실에서 고국의 하늘은 많은 위안이 되어주었다. 연희전문학교에서 천문학을 공부하고 미시간대로 유학, 세계 천문학계에 이름을 알린 뒤 한국으로 돌아와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 천문학계에 많은 업적을 쌓았다.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한서를 많이 읽어 한학에 조예가 깊었고, 놀라운 암기력과 계산력으로 신동이라 불렸다. 1915년 연희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 수물과(수학 및 물리학과)에 입학한 후에는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학생 신분으로 통계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의 빛나는 재능을 아깝게 여긴 선교사이자 연희전문학교 천문학 교수였던 벡커와 루퍼스는 미국 유학을 권했다. 특히 루퍼스 교수는 조선이 몇백 년 전부터 발전시켜 온 천문학을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p.17)

"원철! 나는 조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과학자로서 조선을 존경해. 이미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첨성대와 천체를 그려 낸 천문도까지 정말 훌륭한 유산이 많더군. 앞서 천문학을 연구했던 조선이 원철로 인해 더 크게 발전했으면 하네.”

루퍼스 교수의 기대는 원철의 마음에 별처럼 박혔어요. 원철은 반짝반짝 빛나던 조선의 천문학을 잇겠다고 다짐했어요.

 

이원철은 마침내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더 많이 공부해서 조선을 위해서 일하고 싶었다. 일본의 속국이 아닌, 독립국 조선의 과학 발전을 위해 일할 것을 다짐하며 유학길에 올랐다.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목표는 확고했다.

 

(p.14)

“더 많이 공부해서 자네가 사랑하는 조국을 위해 일하게. 조선을 위해서 말야.”

벡커 교수와 루퍼스 교수의 추천에 원철은 곰곰 생각하다 결심했어요.

‘그래, 서양으로 나가서 근대 학문을 더 공부하자. 그래서 성과를 내어 조선을 알리자. 일본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국 조선을 돌아보게 말이야.’

흐릿하기만 했던 자신의 길이 선명해지는 것 같아 원철은 기뻤어요.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마음을 단단히 먹었지요.

 

두 교수의 추천으로 미국 유학길에 오른 원철은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렸다. 미시간대에서 연구에 매진한 끝에 <독수리자리와 에타별의 대기 운동>이라는 논문으로 1926년 한국인 최초로 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국의 천문학을 발전시켜야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었다. 조선인이 고등 교육을 받는 것을 원치 않던 일제의 훼방으로 숱한 어려움이 있었지만 1928년, 마침내 지름 15센티미터의 굴절 망원경을 들여와 연희전문학교 언더우드관 옥상에 설치하고 천문대를 열었다. 마침내 학생들이 직접 별을 관측하며 천문학을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 학생뿐 아니라 일반 대중들도 과학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그는 대중 과학 강연을 시작했다. 종로 YMCA에서 열리는 그의 목요일 강연은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과학을 널리 알리기 위해 잡지나 신문 기고도 활발히 했다. 연희전문학교 수물과 이름으로 <과학연구>라는 전문지도 펴냈다. 사람들은 조선 유일의 천문학 박사인 그를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1935년, 다시 한국에 온 스승 루퍼스 교수는 파격적인 제안을 한다. 그간 마음속으로 존경하던 조선의 천문학을 함께 연구하고 정리해서 세계 학계에 알리자는 것이었다. 조선의 천문학에 대한 논문을 쓴다는 루퍼스 교수의 말에 원철은 가슴이 뛰었다.

 

그때부터 천문학 고서들과 씨름하며 루퍼스 교수와 함께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해석했다. 조선 태조 4년에 새긴 돌에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는 1,467개의 별과 283개의 별자리를 담고 있다. 중국 남송의 ‘순우천문도’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되었으며, 중국 천문도에는 없는 ‘종대부’라는 별자리가 있고 밝기에 따라 크기를 구분해 훨씬 더 뚜렷하고 섬세하다.

 

 

그 뒤로도 연구와 강연에 매진하던 가운데, 안창호가 결성한 독립운동 단체였던 수양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다 교수직을 8년 동안 박탈당하고 만다. 그는 끝까지 창씨개명에 저항하며 조선이 광복을 맞은 1945년까지 칩거하며 지냈다.

 

광복 뒤에는 ‘국립중앙관상대’의 대장이 되어 기상 관측의 토대를 쌓고, 연희전문학교로 돌아가 기상학과도 새로 만드는 등 그동안 일제의 훼방으로 쑥대밭이 된 학교를 재건하는 데 힘썼다. 새 나라에는 그가 필요한 일이 넘쳐났다. 원철은 끊임없이 공부하고 또 연구하며 독립한 조국의 기상 관측 수준을 끌어올리는 데 전력투구했다.

 

조선 총독부가 만들었던 일본을 위한 역서(달력)가 아니라, 대한민국에 가장 걸맞은 천문 역서를 만들어 배포하는 데도 정성을 쏟았다. 그의 지휘 아래 국립중앙관상대는 점점 기틀이 잡혀갔고,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YMCA 활동도 꾸준히 이어갔다.

 

(p.77)

원철은 죽기 전, 전 재산을 YMCA에 기부한다는 유언을 남겼어요. 아내인 김화순 여사도 남편의 뜻을 이어받아 장례식에서 받은 조의금을 모두 장학금으로 기탁했지요. 원철이 읽었던 책들은 대학 도서관으로 보내졌어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원철은 돈 욕심 없는 과학자로 살았어요. 그러나 매일 했던 기도에서는 욕심을 좀 냈던 것 같아요.

‘하나님, 간절히 원합니다! 나를 훌쩍 넘어서는 훌륭한 천문학자들과 기상학자들이 대한민국에 가득하기를……’

 

1961년부터 15년 넘게 관상대장으로 일하며 우리 천문학과 기상학 발전에 최선을 다했던 이원철, 그를 기리기 위해 2002년 한국천문연구원이 발견한 소행성 ‘2002DB1’에는 이원철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의 인생을 보면 정말 순수한 학자의 열정과 조국에 대한 사랑이 느껴진다. 자신에게 주어진 천재적 재능을 허비하지 않고, 매 순간 뜨거운 열정으로 별을 연구하고 사회에 이바지했던 그의 삶이 오늘날까지 잔잔한 감동을 준다.

 

과학은 국력이다. 조선 세종 때 동아시아 으뜸 과학기술을 자랑하던 조선은 실용적인 학문을 경시하면서 과학 약소국이 되었고, 그 결과는 식민지였다. 아무리 문화가 융성해도 강력한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지 않는 국가는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조국의 하늘을 수없이 올려다보며 긴 밤을 보냈을 과학자, 이원철의 삶에 존경을 표한다. 지금껏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렇듯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과학자가 많지 않을까? 이 책으로 그가 좀 더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우리 하늘을 연구한 과학자 이원철》, 유영소(글), 수봉이(그림), 마음이음, 11,5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