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제 4월 20일 저녁 5시 서울 삼성동 국가무형유산 전수교육관 민속극장 풍류에서 국가무형문화유산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보유자 이재화 명인의 공개 행사가 열렸다.
1896년(고종 33)에 백낙준(白樂俊)이 처음으로 연주했던 ‘거문고산조’, 주로 남도소리의 시나위가락을 장단(長短)이라는 틀에 넣어서 거문고로 연주하는 기악 독주 음악이다.
거문고산조는 현재 한갑득류와 신쾌동류가 전승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한갑득류는 거문고산조 창시자 백낙준의 직계 제자인 박석기 명인에게서 한갑득(韓甲得: 1919~1987) 명인이 전승한 것이다. 한갑득 명인은 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 기예능 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뛰어난 창작능력을 발휘한 <한갑득류 거문고산조>를 남겼다. 현재 국가무형유산 한갑득류 거문고산조 보유자인 이재화 명인은 1969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현 국립국악중ㆍ고등학교)에서 한갑득 명인과 사제의 연을 맺고 한갑득류 거문고산조를 오롯이 전수하여 이날 그 전승행사를 연 것이다.
맨 먼저 무대를 연 것은 이재화 명인의 제자들인 강유경ㆍ박경은ㆍ전진아ㆍ최영훈ㆍ박희정ㆍ이방실ㆍ한나리의 ‘풍류(다스름-하현도드리)’다. 과거 거문고 명인들이 산조 학습 이전에 익혔던 풍류로써 산조의 완성을 꾀했음을 알기에 공연의 포문을 풍류로 열게 된 것이다. 한갑득 명인이 ‘숨은그림찾기’처럼 남겨 놓은 <다스름>에서 빠진 단 하나의 음과 <하현도드리>에서 빠질 수 있는 단 한 장단을 메우려는 자신의 집요함을 명인은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주려 한 듯하다.
이어서 ‘짧은산조’와 ‘긴산조’가 이어진다. 먼저 조영제 고수의 장단에 이재화 명인의 ‘짧은산조’ 연주는 청중을 숨죽이게 만든다. “수많은 명인이 집중해 온 산조는 예술가를 속박하지 않으며 지금도 열려 있다. 산조정신에 기댄 이재화가 감응하고 곱씹어 온 대목들은 오늘 무대 위에서 고수의 장단을 배경 삼아 노닐 생각이다.”라고 한 명인의 말이 들려오는 듯하다. "중언부언하지 않고 할 말만 하는 소리"를 추출하려는 50여 년의 노력이 빛나는 순간이다.
‘짧은산조’가 끝난 다음 다시 강유경, 박경은, 전진아, 최영훈, 박희정, 이방실, 한나리가 나서서 조영제 장단에 맞춰 ‘산조’를 연주한다. 스승 한갑득의 가락을 모아 80여 분의 산조로 집대성한 이재화 명인의 땀방울이 전통에서 길어 올린 정수(淨水)에 목마른 젊은 연주자들에게 스며들고 있다는 느낌이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이번 공연의 대미는 <판소리더늠 이재화류 거문고산조>다. 단위가락이 길고 가사가 있는 판소리는 호소력이 강한데 견줘 산조는 그러하지 못하므로 조변화와 상하청 대비미를 강조할 수 있는 9현 18괘 ‘화거문고’를 개발하여 변화를 시도했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이는 <판소리 더늠 화거문고 산조>는 2022년과 2023년에 한국고음반 연구회에서 복원, 초연한 판소리 더늠을 바탕으로 했다.
명인은 “임방울이 1950년대에 녹음한 적벽가 가운데 군사설움타령(부모생각, 아내생각, 자식생각) 대목을 진양, 중모리, 자진모리에 얹고 1935년 오케이레코드사에서 취입한 수궁가 가운데 수궁풍류대목을 엇모리와 중중모리로 거문고 가락화 하였으며, 이재화의 다스름과 휘모리를 추가하여 전 7악장의 장단구성을 갖는다.”라고 설명한다.
분명히 <판소리더늠 이재화류 거문고산조>는 전통의 산조가 아니라 새롭게 작곡한 음악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동안 익숙하게 접해왔던 창작곡들이 전통에서 벗어나 국악인지 아닌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모호했던 것과는 판연히 다르다. 오로지 거문고산조로서의 향기만 전하려고 노력한다. 다스름-빠른진양-중모리-엇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휘모리로 이어지는 산조는 청중을 꼼짝 못 하게 묶어두는 마력을 뿜어낸다. 산조를 끝내면서 조영제 고수가 급박하게 휘몰이장단으로 쳐낸 마무리는 <판소리더늠 이재화류 거문고산조>의 진가를 분명하게 해주었다.
서울 신월동에서 왔다는 정다연(56) 씨는 “오늘 공연은 판소리 더늠 산조가 가장 인상 깊었다. 개량거문고는 현대 음악에서 기괴한 음악으로만 쓰이거나 선율악기의 반주 정도로 쓰이는 것이 다인 줄 알았는데 낮고 높은음의 상하대비를 이루며 노래로도 힘든 판소리를 악기로 해내는 것이 놀라웠다. 무엇보다 깊은 소리와 괘를 자유롭게 이동하며 명창들이 진성과 가성을 오가며 노래하듯 거문고로 한편의 판소리 한 대목을 듣는 것 같아 오금이 저렸다.”라고 흥분섞인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다.
또 엄마와 함께 왔다는 월촌초등학교 6학년에 다닌다는 김아민 양은 “아직 거문고음악을 잘 모르지만, 공연을 보면서 거문고가 정말 매력 있는 악기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특히 마지막 산조는 끝부분에서 휘몰아치는 연주를 들으면서 빨려 들어간다는 느낌을 받았어요.”라고 말해 거문고산조의 미래를 짐작해 볼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 거문고는 선비들이 자기 수양의 방도로 연주했다고 한다. 그래서 전문 악사들과 함께한 연주를 선비가 이끌 수 있음이었다. 이날 연주는 바로 그런 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무대였다. 점점 국악이 서구화된 창작음악으로 잘못 방향을 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는 이번 이재화 명인의 공개발표회를 통해 말끔히 씻어 준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