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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승국 변호사의 세상바라기

추사가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면서 쓴 시

이 나와 저 나 사이 진정한 나는 없네
[양승국 변호사의 세상 바라기 265]

[우리문화신문=양승국 변호사]  

 

                 自題小照(자제소조)

 

   是我亦我 (시아역아) 여기 있는 나도 나요

   非我亦我 (비아역아) 그림 속의 나도 나다

   是我亦可 (시아역가) 여기 있는 나도 좋고

   非我亦可 (비아역가) 그림 속의 나도 좋다.

   是非之間 (시비지간) 이 나와 저 나 사이

   無以爲我 (무이위아) 진정한 나는 없네.

   帝珠重重 (제주중중) 조화 구슬 겹겹이니

   誰能執相於大摩尼中 (수능집상어대마니중) 그 뉘라 큰 마니 구슬 속에서 나의 실상을 잡아내리.

   呵呵 (아아) 껄껄껄!

 

추사 김정희의 <自題小照(자제소조)>라는 시입니다. 추사가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른 생각을 시로 쓴 것입니다. 추사는 처음에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다, 시를 써서 초상화 오른편 위에 붙였는데, 이 시는 나중에 <自題小照>라는 제목으로 그의 문집 《완당선생전집》에도 실렸습니다. ‘小照’는 ‘照’가 들어간 것으로 보아, 작은 초상화를 뜻하는 것 같고, ‘自題’는 자기가 거기에다 ‘題’를 달아 썼다는 것 같습니다.

 

 

추사는 초상화가 마음에 들었나 봅니다. 현실의 추사도 나요, 그림 속에 들어있는 추사도 나라고 하면서, 현실의 나도 좋고, 그림 속의 나도 좋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그림 속의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겠지요. 그림은 그림이니까요. 그런데 추사는 생각을 더 발전시켜서, “그럼 현실의 나는 나인가?”라는 생각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면서 현실의 나도 ‘참 나’는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럼 진정한 나는 어디 있단 말인가?

 

추사가 이런 생각을 펼친다는 것은 젊었을 때의 추사는 아니겠지요. 실제로 초상화 속의 추사는 노인의 모습입니다. 초상화에 붙인 시의 마지막에도 ‘果老自題(과로자제)’라고 썼는데, ‘果老’는 과천 사는 노인이란 뜻으로, 추사가 인생 말년에 과천에 살면서 자화상을 그리고 시를 쓴 것임을 알 수 있겠습니다. 추사가 71살까지 살았으니, 이 초상화는 아마 70 전후에 그린 것이 아닐까요? 그림 속에서 추사는 어딘가를 응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추사는 실제 앞에 보이는 사물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칠십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 내면을 바라보는 것 같습니다.

 

추사가 이렇게 말하니, 우리 모두 ‘참 나’를 잃어버리고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면 속에 자기 자신을 감추고 사는 것이지요. 그것도 한 개의 가면이 아니라 여러 개의 가면을 준비하여 그때마다 거기에 맞춘 가면을 씁니다. 직장에서는 직장에서 생존하고 승진하기 위해 거기에 맞춘 가면을 쓰고, 사교 모임에 나가서는 남들에게 반짝반짝 빛나 보이게 하는 가면을 씁니다. 심지어는 가정에서도 남편으로서 아내로서 거기에 맞는 가면을 씁니다. 그러다 보면 자기 자신도 ‘참 나’가 어떠했는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다 보면 많은 가면을 쓰게 되지만, 그러한 가면은 추사가 살던 시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다만 현대처럼 많은 가면이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요. 추사도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자신의 ‘참 나’는 어디로 간 것일까?”라는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추사는 帝珠가 겹겹인데, ‘그 누가 큰 마니(구슬)에서 ‘참 나’를 찾아낼 것인가?‘ 묻습니다. 帝珠(제주)와 摩尼(마니)는 불교용어로, 제주는 제석천의 구슬을 말하고, 마니는 여의주 또는 보주(寶珠)를 말한다고 합니다. 추사가 말년에는 불교에 심취하였기에, 시에서도 불교 용어가 나오는군요. 아무튼 추사는 겹겹의 구슬에 비치는 ’나‘ 중에 그 어느 구슬에 비친 것이 ’참 나‘인지, 이를 어떻게 찾아낼 것이냐고 묻습니다. 그림을 보면, 추사도 많은 구슬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다가 “나도 길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 하며, 상념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추사의 시를 다시 음미해 봅니다. 어찌 보면 추사가 자기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장난스레 시 한 편을 휘갈겨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당쟁 속에 살아남으려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쓸쓸한 소회를 쓴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렇게 본다면 추사가 마지막에 ’하하하!‘ 하며 웃는 웃음 속에는 그런 삶에 대한 쓰디쓴 비애도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추사의 시를 읽다 보니, 노산 이은상이 1958년에 쓴 시 <자화상>도 생각납니다.

 

너를 나라 하니

내가 그래 너란 말가

네가 나라면

나는 그럼 어디 있나

나 아닌

너를 데리고

나인 줄만 여겼다

 

내가 참이라면

너는 분명 거짓 것이

네가 참이라면

내가 도로 거짓 것이

어느 게

참이요 거짓인지

분간하지 못할네

 

내가 없었더면

너는 본시 없으련만

나는 없어져도

너는 혹시 남을런가

 

저 뒷날

너를 나로만

속아볼 게 우습다

 

혹시 노산도 추사의 시를 보고 난 뒤, 문득 자신의 자화상을 바라보다가 이 시를 쓴 것은 아닐까? 추사의 시를 보다가 노산의 시가 생각나고, 그러다가 나 역시 ’잃어버린 ‘참 나’는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