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문화유산을 지키는 것은 쉽지 않다.
외세의 침략이 전혀 없었던 나라도 세월의 힘을 견디기 쉽지 않은데, 하물며 우리나라처럼 갖은 침입에 식민지 시절까지 겪었던 경우라면 옛 유산을 잘 보전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다. 실제로 많은 유산이 무관심 속에 잃어버리고, 도둑맞고, 팔려나갔다. 이렇게 우리가 잃어버린 유산들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물론 문화유산의 나라 밖 반출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적법한 경로로 판매된 것이라면 엄연한 소유권 이전으로 그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그 값어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이 너무나 많은 유산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때로는 난폭한 방식으로 없어져 버린 것이다.
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안민영이 쓴 이 책, 《문화재를 지킨 사람들》은 이렇게 우리가 잃은 문화유산을 되찾아 오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 그리고 멋진 용기를 발휘해 돌려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빼앗긴 입장에서야 당연히 돌려주는 게 맞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반출 경로가 어찌 되었든 돌려주기로 하는 것은 큰 용기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현실에서는 한번 잃어버린 문화유산은 좀처럼 되찾기 어렵다. 우리가 그동안 빼앗기고 잃어버린 문화유산의 역사를 다시금 되새김질해야 하는 까닭이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 곧 문화유산을 ‘발견한’ 사람들, ‘지켜 낸’ 사람들, ‘수집한’ 사람들, 반환에 힘쓴 ‘외국인과 외국 기관’, 문화유산을 돌아오게 한 ‘여러 사람과 단체들’로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에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본, 《직지심체요절》을 발견한 박병선 박사의 이야기는 비교적 널리 알려졌지만, 대체로 그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사례들이 풍부하게 실려 있다.
그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것은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의 사례다. 1964년 독일 광산에 파견된 노동자였던 유준영은 3년 계약 근무가 끝나자 1969년 미술사학과에 입학해 대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이후 쾰른대 박사 과정까지 밟았다. 박사 논문을 쓰던 가운데 《한국의 금강산에서》라는 책에 실린 겸재 정선의 그림에 시선이 멈췄다.
(p.35)
《한국의 금강산에서》는 독일 오틸리엔 수도원장이었던 노르베르트 베버가 조선을 방문하고 1927년에 출판한 책이에요. 이 책에는 겸재 정선이 그린 금강산 그림이 소개되어 있었어요.
그때, 유준영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어요.
‘조선에 머물던 오틸리엔 수도원장이 독일로 돌아와 이 책을 썼다면, 어쩌면 그때 겸재 정선의 그림도 가져왔던 건 아닐까?’
책에 실린 정선의 작품 세 점이 독일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는 에카르트 교수를 떠올렸다. 에카르트 교수는 1909년부터 19년간 한국에 머물며 《조선 미술사》를 펴낸 인물이었다. 유준영은 에카르트 교수에게 편지를 보내 베버가 오랫동안 머무른 오틸리엔 수도원에 정선의 그림이 있지 않은지 물었다. 그러나 한 달 뒤에 온 답장에는 ‘수도원에 남아 있는 겸재 정선의 그림은 한 점도 없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렇게 일단락되는가 싶었던 그림 찾기는 1975년, 유준영이 오틸리엔 수도원을 직접 방문하면서 다시 시작됐다. 수도원 안에 있는 박물관을 둘러보던 그는 숨이 멎는 듯했다. 눈앞에 바로 겸재 정선의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담당 신부는 진열장 열쇠를 주며 마음껏 작품을 꺼내보라고 했다. 조심스럽게 그림을 꺼내든 유준영은 다시 한번 놀랐다. 진열장 밖에서 볼 때는 한 점으로 보였지만, 막상 꺼내자 놀랍게도 여러 점의 그림이 묶인 화첩이었다.
(p.37)
세월이 흘러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교수가 된 유준영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떠올리곤 했어요. “책 속에 있는 금강산 그림만 발견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갔는데, 거기에 금강산 그림 말고도 겸재의 그림을 열여덟 점이나 더 발견했으니까 그야말로 복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았어요. 호박 세 개만 찾으러 갔는데 스물한 개가 넝쿨째 굴러들어 온 셈이었죠.”
수도원 담벼락 앞 공터에서 펼쳐본 화첩은 스물한 장의 그림이 병풍처럼 구성된 것이었다. 유준영은 화첩을 담장에 기대어 놓고 한 장 한 장 사진을 찍었다. 그로부터 1년 뒤, 그가 쓴 논문을 통해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는 겸재 정선의 화첩이 국내에 알려졌다. 베버의 책에 실린 그림을 보고 끝까지 찾아갔던 한 유학생의 열정이, 독일 수도원에 잠들어 있던 문화유산을 흔들어 깨운 것이다.
그 화첩이 오틸리엔 수도원에 들어간 전말은 이랬다. 1910년 무렵부터 약 10년 동안 세 차례 선교를 위해 한국을 찾은 베버는 지방을 다니며 당시 생활 모습을 영상으로 남기고, 이를 바탕으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과 영상을 만들었다. 1925년 다시 조선을 찾았을 때는 열흘 동안 금강산을 방문해 직접 금강산의 모습을 그리기도 했다.
그 뒤 독일로 귀국해 펴낸 책이 바로 《한국의 금강산에서》였다. 정선의 화첩은 베버가 독일로 귀국하면서 가져간 것이었지만 어떻게 소장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었고, 정황상 여행하며 묵었던 여관에서 전시된 그림을 산 걸로 추정할 뿐이었다.
이 화첩은 그러면 어떻게 되었을까? 정말 기적처럼 한국의 왜관 수도원에 영구 대여되었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다. 1990년대 초 오틸리엔 수도원에 있었던 선지훈 신부가 겸재 화첩을 눈여겨보고 있다가, 마침 자신이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수행할 무렵 기숙사 동기였던 슈뢰더 수사가 수도원장이 되자 정선의 화첩을 한국으로 반환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사실 그때 정선의 그림은 세계 미술 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었고, 미국과 영국의 경매 회사가 그림을 경매에 출품하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림의 값어치를 고려하면 수도원의 재정 마련에 큰 도움이 될 좋은 기회였다.
수도원에서는 장로 열두 명이 모인 회의가 열렸다. 긴 토론이 오간 끝에, 만장일치로 베네딕도회 수도원과 인연이 깊은 한국의 왜관 수도원에 영구 대여하기로 했다. 사실상의 반환이었다. 반환 시기는 오틸리엔 수도원이 속한 베네딕도회가 한국에 진출한 지 100돌이 되는 2005년으로 정했다.
(p.42)
이때 슈뢰더 원장은 이런 이야기를 했답니다.
“나의 선임자인 노르베르트 베버 원장은 진정 한국 문화를 사랑한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이 화첩이 독일보다 한국에서 더 많은 사랑을 받고 평가받으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이 어렵지 않았어요. 올바른 결정이라고 생각하며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저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 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2005년 정선의 화첩이 돌아올 때, 반환에 큰 역할을 했던 선지훈 신부가 독일로 날아가 그림을 가지고 왔다. 1920년대 독일로 건너간 화첩이 돌아오기까지 무려 80년이 넘는 세월이 걸린 것이다. 한 유학생의 관심과 열정, 한 신부의 끈질긴 노력, 그리고 오틸리엔 수도원의 멋진 결정이 화첩을 ‘더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는 곳’에 돌아오게 했다.
수도원이 보여준 결단은 무척 특별한 경우다. 외국으로 반출된 과정이 불법이 아닌데도 아무런 조건 없이 문화유산을 되돌려준 사례는 극히 드물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 차원이 아닌, 민간 차원의 꾸준한 노력과 협의로 반환이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문화유산 반환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이 책에는 이처럼 극적으로 발견되고 돌아온 문화유산 이야기가 많다. 모두 우리가 마음에 새겨야 할 소중한 사례들이다. ‘잊힌 역사의 조각들을 되찾다’라는 이 책의 부제가 보여주는 것처럼, 잊힌 역사의 조각들이 다시 모이면 멋진 조각보가 된다.
2020년에 펴내 ‘문화재’의 이름이 ‘국가유산’으로 바뀐 것을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데 차제에 개정판을 펴내 이름도 바꾸고, 또 새로이 소개할 만한 사례가 있다면 더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문화유산에 관심 있는 누구나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