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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깨끗하게 살다 간, 우리 역사 속 청백리 34인

《어린이를 위한 청백리 이야기》, 글쓴이 임영진, 그린이 지영이, 어린른이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청백리(淸白吏)!

‘청백’은 ‘청렴결백’을 줄인 말로, 마음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는 뜻이다. 맑고(淸), 깨끗한(白) 그 이름처럼 청백하게 살다 간 이들이 있다. 조선시대 수많은 이들이 벼슬을 거쳐 갔지만, 그 가운데 청백리로 뽑힌 인물은 200명 안팎에 지나지 않는다. 그만큼 청백리가 된다는 것은 가문의 영예요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예로부터 공직자의 으뜸 덕목은 청렴이었다. 지금이야 공직자도 재테크를 잘해야 기를 편다고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공직자가 가난한 것을 오히려 멋스럽게 여기는 풍조가 있었다. 공직자가 지나치게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고혈이 녹아있다 보았던 까닭이다.

 

임영진이 쓴 책, 《어린이를 위한 청백리 이야기》는 비교적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있는 조선 시대 청백리들을 중심으로, 고려와 신라 때 청렴했던 관리들의 미담까지 모두 34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이 소개하는 청백리의 미담을 읽다 보면 진정 어려운 길을 걸은 이들의 기백에 새삼 머리가 숙어진다.

 

 

자신이 조금만 손을 뻗으면, 조금만 눈을 감으면 금전적 이득을 볼 수 있는 순간들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자리가 올라갈수록 그런 유혹은 더 커진다. 그럴 때 단호하게 자신을 절제할 수 있는, 그리고 주변을 단속할 수 있는 마음가짐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다.

 

고려 시대에도 승평 부사를 지낸 최석이 두 아들에게 ‘청백 말고 다른 재물은 가문에 전하는 바가 아니다’라며 책 만 권을 전한 미담이 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청백리를 뽑아 관리의 모범으로 삼을 만큼 청렴을 제도적으로 장려했다. 이것이 조선이 부침을 거듭하면서도 500여 년을 이어간 또 다른 저력이라 할 수 있다.

 

그 가운데 새길 만한 인물로는 ‘삼마(三馬) 태수’ 송흠이 있다. 고을 수령이 임금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던 시절, 수령이 임기가 끝나 다른 곳으로 부임해 갈 때면 먼저 있던 고을에서는 말 여덟 필을 내주었다. 집안이 넉넉한 수령은 가마까지 동원해 행차가 자못 요란스러웠다.

 

그러나 송흠은 언제나 자신과 아내, 어머니가 타고 갈 말 세 필만 빌렸다. 고을 백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마음에서였다. 말 세 마리만 얻어 타는 태수라 하여 백성들은 그를 ‘삼마태수’라 불렀다.

 

송흠은 타고난 성품은 너그러웠으나 일 처리만큼은 꼼꼼하고 매서웠다. 그가 관아 아전들을 잘 단속한 덕분에 검은 손이 사라지고 백성들의 주름도 펴졌다. 백성들 사이에서 삼마태수에 대한 칭송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가 부임한 전라도 여산은 교통의 요충지였다. 자연히 찾는 손님이 많았고 대접하는 데 드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오는 손님을 막을 수도 없고, 대접을 소홀히 하는 것도 옳지 않으니, 경비를 줄이기 위해 고심하던 그는 마침내 좋은 방도를 떠올렸다.

 

(p.88)

웬만한 관리들 같으면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손님들을 접대하겠지만, 송흠이 누군가? 삼마태수 아닌가.

‘옳거니! 그러면 되겠구나.’

송흠은 ‘호산춘’이라는 술을 손수 빚었다. 그 뒤로 손님이 찾아오면 호산춘에 간소한 안주만 내왔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한결같으니, 손님들도 섭섭할 리가 없었다.

 

호산춘은 지금도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의 대표 명주다. 백성을 위하는 어진 마음 씀씀이가 좋은 술을 탄생케 했으니, 앞으로 호산춘을 보면 송흠을 떠올리며 청백리 정신을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한편 조선시대 처음으로 임금에게 ‘백비(白碑)’를 받은 박수량의 미담도 실려있다. 박수량은 명종 임금 시절의 대표적인 청백리였다. 명종은 청렴한 것으로 소문난 그를 무척 아꼈다. 암행어사가 박수량이 벼슬길에 오른 지 사십 년 가까이 되어 재상의 자리까지 올랐으나, 천장에 비가 새는 두어 칸 초가에 살고 있다고 하자 고향에 아흔아홉 칸짜리 집을 내리고 ‘청백당’이라는 이름도 지어주었다.

 

(p.95)

명종 9년. 박수량은 지금의 서울 시장인 한성부 판윤을 거쳐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유언으로 ‘내가 죽으면 고향에 묻되, 묘도 크게 쓰지 말고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 그런데 어쩌랴. 한양에서의 살림살이가 어려워 그의 시신을 고향까지 모시고 갈 형편이 못되었다.

“어질고 청백한 신하를 잃으니 가슴이 찢어지는구나!”

명종 임금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모든 장례비용을 내려주었다. 그래도 안타까워 서해 바다의 곱고 흰 돌을 골라 묘비로 쓰라고 명하였다.

“그의 청렴함을 어찌 몇 줄 글로 다 표현하겠느냐. 그를 기린다고 하여 오히려 흠이 될까 염려되니, 그냥 비문 없이 세우거라.”

 

이리하여 글자 없는 묘비, 백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임금이 신하의 무덤에 비를 내린 것도 드문 일이건만, 심지어 백비를 세우라 명한 것은 박수량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지금도 장성에 가면 전란 가운데 소실되어 현대에 새로 조성한 청백당과 백비를 볼 수 있다.

 

이렇듯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온 청백리 정신은 나라를 지탱하는 바탕이 되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말처럼, 위에서 기강을 엄정히 해야 아래에서 농간을 부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평소에는 온화하고 관대하면서도 공직기강은 엄히 했던 공직자들의 추상같은 면모를 배우고 또 익혀야 할 것이다.

 

뇌물 수수, 공금 횡령 등 부패와 비리로 하루가 멀다고 세간이 떠들썩한 때, 청백리들의 사례를 짚어보며 고요히 마음을 가다듬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무수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 관리, 주변 관리를 철저히 했던 옛 공직자들은 오늘날에도 잔잔한 울림을 준다. 특히, 공직자를 꿈꾸는 어린이들이 읽으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