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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시대를 풍미한 비운의 개혁가, 조광조

《조광조》, 신송민, 파랑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206)

임금을 어버이처럼 사랑하였고

나라를 내 집처럼 근심하였네

해가 아랫세상을 굽어보니

붉은 충정을 밝게밝게 비추어 주리

 

조광조가 사약을 마시기 전 남긴 절명시(絶命詩)다. 조광조의 죽음을 알자, 머리를 풀고 통곡하는 선비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조광조는 중종 재위 당시 조정에 출사하여 중종의 무한 신임을 받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다가, 중종이 마음을 바꿔 갑자기 제거된 인물이다.

 

그의 행적을 두고 ‘정말 아까운 인물’이라는 평과 ‘지나치게 급진적이어서 적이 많았던 인물’이라는 평이 공존한다. 둘 다 맞는 말이다. 개혁을 부르짖는 ‘젊은 피’였으나, 10년에 한 번 추진하기도 어려운 개혁들을 3~4년 안에 완수하려는 조급증이 화를 불렀다.

 

신송민이 쓴 이 책, 《조광조》는 역사학자 33인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꼭 알아야 할 역사인물 60인을 골라 펴낸 ‘인물 이야기’ 가운데 20번째 책이다. 조광조는 중종 시대를 다룬 사극이나 한국 역사에 남을 선비를 다룰 때 빠지지 않을 만큼 비중 있는 인물이다.

 

 

조정에 화려하게 출사한 유림의 기대주였던 조광조는 명문대가 출신으로 짐작하기 쉽지만, 생각보다 증조부나 조부, 아버지의 벼슬은 높지 않았다. 물론 고조부인 조온은 이성계가 나라를 세울 때 큰 공을 세운 개국 공신이었고, 죽은 뒤 임금이 업적을 기려 양절공(良節公)이라는 시호를 내릴 정도로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조광조는 자라면서 용모가 수려하여 눈길을 끌었다. 옳지 못한 것을 보아넘기지 못하는 기질이 있었고, 수다스럽지 않으면서도 이치에 맞게 차근차근 말을 잘하여 듣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매력이 있었다.

 

한편 조광조의 성장기에 특이한 인연이 있었으니, 바로 유학자 김굉필과의 만남이다. 조광조가 17살 되던 해 아버지 조원강이 평안도 어천(지금의 영변) 지역의 찰방으로 임명되었다. 찰방은 오늘날의 철도 역장과 같은 종6품 벼슬로, 벼슬이라고는 하나 여진족이 침략해오기도 하는 산간벽지로 가는 것이라 조원강은 수심이 깊었다.

 

조광조는 쓸쓸하게 떠나는 아버지를 위로해 드리고 싶기도 하고, 그곳에 사는 백성들이 어떤지 보고 싶기도 하여 아버지를 따라 어천으로 갔다. 그리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명한 대학자 김굉필이 어천에서 멀지 않은 희천에서 귀양살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많은 선비가 화를 입은 무오사화에 휘말려 희천 땅으로 귀양을 온 김굉필은 적적하게 지내고 있었다. 조광조는 그런 훌륭한 선생님에게 글을 배우고 싶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고, 아버지 또한 무척 기뻐하며 아들을 잘 부탁드린다는 편지를 써 주었다.

 

(p.26)

회천은 청천강 상류의 산간벽지에 있는 고을이다. 그 고을에 가려면 청천강을 따라 서쪽으로 가서 동쪽으로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만 했다.

김굉필은 백리 길을 걸어서 찾아온 조광조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외로운 귀양살이에 지쳐있는 그가 아닌가. 김굉필은 자기를 찾아온 젊은이를 보자 생기가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조광조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희고 깨끗한 얼굴에 맑고 그윽하게 빛나는 눈, 몸 전체에서 고개가 숙여지는 듯한 기풍이 풍겨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말을 나누어 보니 책을 많이 읽은 듯, 아는 것이 많고 총명했다. 뿐만 아니라 정열적이기도 하지 않은가.

‘음, 쓸 만한 기둥이 되겠구나!’

 

한양에서 교분이 없던 그들이 먼 어천 땅에서 만나게 되는 것을 보면,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는 모양이다. 비록 1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광조는 대학자 김굉필 문하에서 수학하며 학문이 더욱 깊어졌다.

 

조광조가 ‘소학(小學)’이라는 책을 중시한 것도 ‘소학 동자’라 불리던 김굉필의 영향이 컸다. 훗날 조광조는 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경연관이 되었을 때 소학과 근사록을 강의하고, 소학을 전국에 널리 보급하기도 했다.

 

조광조가 본격 출사하였을 때는 34살로, 비교적 늦은 편이었다. 1510년(중종 5년), 29살 되던 해 소과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던 가운데 이조판서 안당의 천거로 종이를 만들던 관아인 조지서의 종6품 사지(司紙)에 임명되기도 했지만, 정식 관문인 대과를 거치지 않고 얻은 관직이라 조광조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조광조는 1515년, 34살에 마침내 경복궁에서 있었던 대과시험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다. 참다운 도학 정치, 곧 성리학에 기반한 정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간언하는 조광조를 중종은 매우 아꼈고, 조광조는 관직에 들어온 3년이 채 못 되어 홍문관 부제학(정 3품)이 될 만큼 승진이 빨랐다.

 

그는 성리학의 대가인 고려 말의 유학자 정몽주를 문묘(공자의 신주를 모신 사당)에 모시고, 각 고을의 수령이 인재들을 추천하여 그들을 다시 시험해서 뽑아 쓰는 현량과를 제안했다. 현량과를 시행하면 시골 벽지에 숨어있는 좋은 인재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정책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지만, 김안로나 윤임, 남곤 등 기존의 세력들에게는 36살밖에 안 되는 풋내기가 국정을 좌지우지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조광조는 당사자가 있는 앞에서도 소인이라고 비난하거나 성리학이 아닌 학문은 배척하는 태도를 보여 유연성이 부족한 면도 있었다.

 

조광조와 중종의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해와 달, 별에게 제사를 지내고 소망을 비는 관청인 소격서(昭格暑)를 철폐하는 문제로 대립하면서였다. 조광조는 소격서에서 미신을 섬기는 제사를 지내 백성들이 무속을 즐기게 되니, 백성들이 올바른 도를 이행할 수 있도록 소격서를 철폐해야 한다고 했다.

 

중종은 오래전부터 있어온 소격서를 철폐할 수 없다고 했으나 조광조는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이끌고 전면 사직, 철야 농성 등의 수단을 써가며 소격서 철폐를 관철했다. 이 일을 계기로 조광조의 벼슬은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까지 올랐지만, 지나친 승진으로 적은 더 많아지고 말았다.

 

결국 조광조는 연산군을 옥좌에서 몰아낸 중종반정으로 생겨난 공신들 가운데 공이 적은 자는 훈작(공을 세워 얻은 등급과 벼슬)을 삭제해야 한다는 위훈삭제를 주도하다 중종과 더욱 사이가 멀어지고 말았다. 그 틈을 타고 조광조가 임금이 될 것이라는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자가 쓰인 나뭇잎이 발견되면서 중종은 그를 제거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는 사실 남곤, 심정 등 기존 훈구세력과 후궁들이 꾸민 음모였지만, 지나친 개혁과 일방적인 도학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던 중종은 밀지를 내려 조광조와 그를 따르던 선비들을 잡아들였다. 이로써 조광조는 붕당을 만들어 나라를 그르치게 했다는 죄를 덮어쓰고 곤장 100대를 맞은 뒤 유배되었다. 그를 따르던 선비들도 모두 변방으로 유배를 가거나 화를 입으니, 기묘년에 일어난 일이라 하여 기묘사화라 했다.

 

조광조는 전라도 능주(오늘날의 화순)에 유배되어 임금이 다시 불러주길 기다렸지만, 결국 사약을 받고 38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34살의 나이로 관직에 들어와 4년간 숨 가쁘게 개혁을 추진하다 38살에 사사되니, 참으로 짧지만, 강렬한 영욕의 세월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해 보려는 조광조의 패기는 무척 신선했어도, 그 방법이 너무 급진적이고 미숙한 면이 많았던 것 같다. 모두 그 뜻을 높이 사면서도 그 방법에 관해서는 아쉬워하는 평이 두고두고 나오는 배경이다.

 

책에서 조광조의 잘생긴 용모를 지나치게 자주 언급하며 부각하는 것은 다소 아쉬운 대목이다. 500여 년 전 패기 넘치는 한 젊은 선비의 도전은, 비록 허무하게 꺾였을지라도 오늘날까지 잔잔한 울림을 준다. 그가 품었던 이상이 무척 높고 뜨거웠던 까닭이다.

 

중종보다 더 영명한 군주를 만났더라면 조광조의 최후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언뜻 잘 맞는 듯 보였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난 군신 관계의 씁쓸한 모습이다. 개혁을 추진한다면, 조광조의 사례에서 배울 점과 반면교사를 동시에 얻어봐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