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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두 천재의 사상적 대결, 오늘날에도 이루어지기를

《이황 & 이이,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 조남호, 김영사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이황과 이이.

이름도 비슷한 두 사람은 조선 중기 비슷한 시기에 살면서 조선의 사상사를 한 단계 발전시킨 거목들이다. 지금도 천 원권과 오 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왠지 모를 친근함을 주지만, 두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 견줘서 살펴본 일은 드물 것이다.

 

이황과 이이는 관직에 나아가 현실정치에 참여하는 경세가이기도 했지만, 조선 지성계를 주름잡는 학자이기도 했다. 특히 이황은 분주한 관료 생활보다 오늘날의 대학 총장과 흡사하게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의 역할을 더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

 

조남호가 쓴 이 책, 《이황 & 이이, 조선의 정신을 세우다》는 비슷한 듯 다른 두 사상가의 모습을 견줘 보여주는 책이다. 둘은 ‘리(理)’에 대해 서로 다른 해석을 하며 사상적으로 대결하기도 했지만,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임금의 공부를 힘껏 돕기도 했다.

 

 

이황은 1501년에 태어나 1570년에 7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이이는 1536년에 태어나 1584년에 49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이황의 사상적 스승은 중국 송나라 시대 학자인 주희였다. 주희를 평생 흠모했던 이황은 주희의 문집인 《주희대전》을 들고 산에 들어가 주자학의 진수를 밝혀내고, 요약본인 《주자서절요》를 펴냈다. 이이는 34살 때 홍문관 교리라는 벼슬을 하면서 한 달 동안 동호에서 독서하고, 그 체험을 바탕으로 《동호문답》을 펴냈다. 또한 《격몽요결》을 저술해 《소학》을 우리식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격몽(擊蒙)’은 어린아이의 우매함을 깨운다는 뜻이다.

 

두 사람의 저작 가운데 가장 집필 의도가 비슷하고, 또 서로 건설적인 비판을 주고받으며 ‘개정판’까지 낸 것은 이황이 쓴 《성학십도》와 이이가 쓴 《성학집요》다. 두 책 모두 어린 임금이었던 선조의 마음 수양과 국정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특별히 집필된 책이다.

 

《성학십도》는 말 그대로 성리학의 진수를 열 개의 그림으로 축약한 것으로, 오늘날의 인포그래픽과 비슷했다. 선조가 17살일 때 68살의 노학자 이황이 임금을 향한 마지막 충정으로 소책자를 올렸고, 선조는 이 그림을 족자로 만들어 가까이 두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황 또한 당대 으뜸 학자였음에도 이이가 《성학십도》의 열 개 그림 가운데 하나인 <대학도>에 문제를 제기하고, <인설도>가 <심학도> 앞에 나와야 한다고 주장하자 이를 받아들여 수정한 것이다. 이황은 학문적 자부심이 강했으나 비판에 열려있었고, 소장 학자들의 의견을 단순히 후배라는 이유로 무시하지 않고 진지하게 듣는 장점이 있었다.

 

이이가 올린 《성학집요》는 그림 없이 글로만 되어있었고, 마음을 수양하는 수기(修己)에다 경세의 측면을 더한 책이었다. 경전과 역사책 가운데 학문과 정사에 절실하고 요긴한 말을 가려 뽑아 차례로 분류해 다섯 편으로 나누어 펴냈다. 《성학집도》는 마음 수양, 《성학집요》는 나라 운영에 방점을 둔 차이는 있으나 두 책 모두 당대 으뜸 석학이 임금을 위해 특별히 지은 책이라는 점에서 선조는 참 신하복이 있었던 듯하다.

 

두 사람은 정치적 행보도 사뭇 달랐다. 이황은 대사성, 판중추부사 등 여러 고위 관직을 제수받았으나 정치와는 거리를 둔 데 반해, 이이는 대사간, 대사헌, 이조판서, 형조판서, 호조판서 등 오늘날의 장관에 해당하는 판서직을 두루 거치며 정치적으로 깊숙이 관여했다.

 

두 사람은 학문적 견해도 다른 점이 많았다. 이황과 이이는 사단과 칠정에 대해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었다. 사단은 《맹자》에 나오는 말로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을 말하고, 칠정은 《예기》에 나오는 것으로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망을 말한다. 사단이 도덕적인 감정이라면 칠정은 일반적인 감정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사단은 원칙을 뜻하는 리(理)가 발동한 것이며 칠정은 기(氣)가 발동한 것으로 사단과 칠정을 분리해서 생각했지만, 이이는 사단과 칠정의 관계는 분리된 것이 아니라 칠정 가운데 사단이 포함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반적으로 이이는 원칙과 현실을 통합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고, 이황은 좀 더 관념적이고 현실과 원칙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두 사람은 사단과 칠정의 관계에 대해 논쟁을 하기도 했지만, 각자의 입장을 확인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두 사람의 사상적 지향점은 달랐으나, 두 사람이 있었기에 조선의 사상사가 좀 더 풍성해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조선의 성리학은 자칫 송나라 주희의 주자학을 해석하는 선에서 그쳤을 수도 있지만, 두 사람의 이바지로 후대 지식인들의 사유 체계는 좀 더 정교해졌다.

 

다만, 조선 중기가 지나며 학문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회가 오직 성리학 일변도로 흐른 것은 아쉬운 대목이다.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정체된 채 흐르지 않는다. 모든 것은 움직임이 있어야 하고 흘러가야 하는데, 고인 물이 된 조선 사상계가 변화하는 현실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면서 조선 사회는 결국 동맥경화 상태에 이르렀다.

 

두 천재의 사상적 대결을 보면서, 오늘날에도 사회 전반에 이런 진지한 철학적 논쟁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이 책에서 보는 것처럼, 석학들이 끊임없이 상호 교류하며 자신의 학설을 발전시키는 지적 역동성을 갖춘다면, 사회는 한층 더 건강하게 발전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