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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다시 부채를 꺼내 들며

접부채, 고려로부터 중국으로 알려져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58]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전국이 장마권이다. 비가 억수처럼 온다는 소식이다. 비가 오는 사이사이로 잠깐 햇빛이 고개를 내밀면 바로 무더위다. 대중교통의 냉방이 가동되어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더위를 잊는다. 그러나 내려서 집으로 오는 동안에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할 수 없이 장롱에 들어가 있던 부채를 꺼내어 들어본다. 꺼내어 든 부채에는 먹으로 시원한 산수가 그려져 있다. 더운 만큼 부채가 더 춤을 춘다.

 

 

한쪽 죽지는 숨겨놓고

구름 속 멀찍이 숨겨놓고

한쪽 죽지만 접었다 펼쳐 든 날개라 하자

떨리는 눈썹은 내리깔고

이마 위에 주름살 다시 걷어

안개를 실어낸 학(鶴)이라 하자

물결에 일렁이는 학(鶴)이라 하자

                                    ... 김상옥(金相沃) ‘부채’ 중에서

 

시인의 영감은 부채의 움직임에서 고고한 학의 날개짓을 연상, 추출해냈다. 너울거리는 날갯짓은 한쪽 손으로 접었다가 펼쳐 드는 모양이요, 물결에 일렁이는 학은 섬섬옥수로 부채를 부치는 모양을 표현했으리라. 몹시 무더운 날 연거푸 활활 부치는 모양은 신들린 듯 너울대는 춤, 바로 그것이 아닌가? ​

 

조선시대 태종 임금은 ‘朗月淸風在手中’(낭월청풍재수중)이라고 했다. 밝은 달, 맑은 바람이 손바닥 안에 있다는 말이다.

 

같은 시대 문신인 권근(權近, 1352~1409)은 ‘披拂淸風起’(피불청풍기)라고 했다. 맑은 바람이 활활 쏟아져나오는 형상을 묘사했다.

 

부채는 바람을 일으킨다는 뜻의 동사 ‘부친다’의 어간 ‘부’와 나뭇가지나 자루를 뜻하는 ‘채’가 합쳐진 말이라고 하는데, 한자로는 ‘선(扇)’이라고 쓴다. 글자의 형태를 보면 부채의 가장 최초의 형태는 나뭇잎이었을 것이다. 인류의 지혜가 아직 깨우치기 전, 옛사람들은 무더운 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착안해서 나뭇잎으로 인공적인 바람을 일으켜 부쳐보니 무척 시원했을 것이며, 그래서 나뭇잎을 보다 견고한 형태의 부채로 개량해 나갔을 것이다. 나뭇가지로 얼기설기 틀을 만든 뒤, 헝겊이나 가죽, 그리고 훨씬 후대에 이르러 발명된 종이라는 재료를 붙인 형태가 초기의 부채로 생각된다. ​

 

중국 전설상의 임금인 순(舜)임금은 요(堯)임금으로부터 임금 자리를 물려받은 뒤, 천하의 현인들을 널리 구해서 오명선(五明扇)을 만들어주었다고 하니 중국은 오래전부터 여름에 몹시 더웠던 모양이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은 초량선(招凉扇)이라고 시원함을 불러오는 부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

 

 

고구려에서는 통구(通溝) 12호분(號墳)(6세기경) 여인행렬도(女人行列圖)에 「병선(柄扇)」 곧 긴 자루 부채가 보인다. 이것은 깃털로 만든 우선(羽扇)으로 의장용(儀仗用)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보다 앞선 4세기 무렵 황해도 안악 3호분 벽화도 주인공이 우선(羽扇, 새의 깃으로 만든 부채)을 들고 앉아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지난 1990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발굴조사단에 의해, 경남 의창 다호리(茶戶里)고분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 것으로 추정되는 깃털우산의 옻칠자루(漆羽扇)(柄)가 출토됨에 따라 우리 조상들도 일찍부터 부채를 즐겨 썼음을 알수 있다. ​

 

우리나라 문헌에서 부채에 관한 첫 기록은 《삼국사기》 甄萱(견훤)조에 ‘우리(고려) 태조가 즉위하였을 때 견훤이 그해 8월 使者(사자)를 보내어 하례(賀禮)하고 공작선(孔雀扇, 붉은색으로 공작을 화려하게 그린 부채)과 지리산 죽전(竹箭, 대나무로 만든 화살)을 보내었다’라는 내용으로서, 이때가 서기 918년이다.

 

고려 때에는 고려의 사신 최사훈(崔思訓)이 접첩선(摺疊扇, 접부채)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중국 송나라 신종(神宗)의 희녕(熙寧) 병진(丙辰)년(1076년) 조에서 발견되므로, 11세기 중엽에 이미 우리의 접부채가 중국에까지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부채는 크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가 자루가 달리고 부채의 모양이 둥근 것이니, 이를 방구부채라고 하고, 한자로는 단선(團扇), 또는 원선(圓扇)으로 표기한다. 또 하나는 접었다가 펼칠 수 있는 것으로, 접부채 또는 쥘부채라고 한다. 한자로는 쓰기 어렵다. 두 부채를 견줘본다면 접부채보다는 방구부채가 먼저 생겼고, 접부채는 휴대하거나 쓰기에 간편한 것으로 보아 후대에 발명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오명선이나 초량선 등은 방구부채의 아버지뻘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접는 부채는 일본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회선(檜扇)이라고 해서 회나무의 껍질을 몇십 장 엮은 뒤백지를 바르고 등꽃모양을 실로 수놓아 띠같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대 일본에서 만들어진 회선(檜扇)이 하나 남아있어서 일본의 국보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고 한다. 이 회선이 접는 부채의 첫 형태로 보인다.​

 

莫怪隆冬贈扇枝 한겨울에 부채를 준다고 이상하다 생각 말게

爾今年少豈能知 너 지금 어리니 어찌 알리요

相思半夜胸生火 임 그리는 가슴에 한밤 불길이 일어나

獨勝炎蒸六月時 6월의 복더위보다 더하단다.

 

황진이(黃眞伊)의 무덤에서 애절한 시조를 읊어 후세에 유명한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남긴 칠언절구의 이 멋진 한시는 부채를 선물로 주면서 가슴의 끓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요즘이 음력 월이니 딱 요 때다. 어린 기생에게 보낸 것이라고 하는데, 요즘 기준으로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무더위를 식히기 위한 부채가 마음의 선물로 탈바꿈하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우리 속담에 ‘여름 생색에는 부채요, 겨울 생색에는 달력이라’라는 말이나, ‘단오선물은 부채요, 동지 선물은 책력(달력)이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한창 무더워지는 음력 5월 단오를 즈음해서 부채를 서로 주고받는 풍습이 우리나라에 있음을 알려주는 말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바친다. 전라도와 경상도의 감사(監使)와 통제사(統制使)는 접부채를 올린다. 그러면 임금은 그것을 각 궁에 속하는 하인과, 재상, 시종관들에게 나누어 준다’라는 기록이 있다.

 

《열양세시기(冽陽歲時記)》에도 ‘공조와 전라도, 경상도의 두 감영(監營:감사가 있는 곳)과 통제영(統制營, 통제사가 있는 곳)에서 단오 때가 되면 부채를 만들어 진상한다. 그러면 조정에서는 이를 시종관 이상 삼영에까지 모두 그 열에 따라 차이가 있게 나누어 준다. 그리고 부채를 얻은 사람은 다시 그것을 자기의 친척, 친구,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준다’라는 풍속을 전하고 있다. 태종 15년에 임금의 탄신일을 기려 충청도관찰사가 윤선(輪扇, 둥글부)을 진상했다는 기록도 《조선왕조실록》에 나오고 있어서, 조선조 초기에는 간헐적으로 진상의 사례가 있다가 나중에는 하나의 풍습으로 발전해 온 것으로 보인다.

 

단오 때 부채 진상이 제도화되자, 부채의 산지로 유명한 전주에서는 감영(監營)에 선자청(扇子廳)을 두었고, 선자청에서는 해마다 단오를 앞두고 극상품의 부채를 골라 4월 20일까지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이렇게 단오에 부채를 조정에 올리는 일은 생각보다는 꽤 힘든 일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부채를 만든 것 가운데 가장 좋은 것만을 골라서 보내야 하고, 수고의 대가를 받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대밭(竹田)이 황폐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조정의 신하 가운데는 이러한 단오진선(端午進扇, 단오에 부채를 진상함)의 폐를 임금에게 보고하고, 그 규모를 줄일 것을 건의하기도 했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접는 부채는 만들 때 길이가 길고 살이 30개를 넘는 큰 것을 만드는 것이 보통인데, 큰 대를 잘라도 소용에 맞는 것은 1~2개 마디밖에 구하지 못해, 부채 한 개를 만드는 데에도 큰 대 몇 개를 잘라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때에는 부채살 수를 20으로 제한하고, 길이도 6~7촌을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기도 했다지만, 단오진선(端午進扇)은 조선시대 중엽부터 한말까지 이어지면서 계속됐다.

 

 

부채는 접을 수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방구부채와 접는 부채로 크게 나눌 수 있지만, 부채의 모양이나 재료, 또 생활 용도에 따라 수많은 종류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접는 부채가 고려로부터 중국으로 알려지게 됐다는 부분이다. 이것은 접부채가 초기에 일본에서 원형이 발견됐지만, 고려 사람들이 이를 쓰기 좋고 멋지고, 간편하게 개량했기에, 중국의 방구부채를 밀어내고 세계 부채사의 새 주역으로 등장했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송나라 때의 유명한 문인이며 정치가인 동파(東坡) 소식(蘇軾)이​

 

고려의 백송선은 펴면 넓이가 한 자나 되고,

접으면 단지 두 손가락만 해진다.

高麗白松扇 展之廣尺餘 合之只兩指​

 

라는 말로 접부채의 편리함을 칭찬한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단오 때 부채를 선물로 받으면 사람들은 대개 금강산 1만 2천봉을 그렸다고 한다. 금강산 깊은 계곡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대로 부채에서부터 나오라는 뜻일까? 혹은 방 안에 앉아서 금강산 구경을 대신하면 무더위를 절로 잊을 수 있다는 뜻일까? 친한 사람들은 부채를 줄 때에 그냥 주기가 무엇하니까 좋은 글귀를 써 주거나 그림을 그려 넣어 주거나 한다. 유명한 화가나 명필들의 것은 뒷사람들이 따로 떼어내어 표구를 해서 걸어두며 감상하기도 했다.

 

 

여름철 시원함을 위해 쓰는 부채는 일상생활에서 예절을 중시하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태도와 밀접히 결합하여 파생적인 용도를 많이 갖게 된 것이 우리나라만의 재미라고 할 것이다. 중국인들이 고려 사람들은 겨울에도 부채를 들고 다닌다고 하던 데서 보듯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더위를 쫓는 데만이 아니라 체면을 지키고 행동의 법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부채가 상비품이 됐다.

 

부채도 시속에 따라 그 모양이 새로워 지기도 하고 얼마간 존재하다간 없어지는 등 변천을 계속해 왔다. 접부채도 큰 것으로 좋아하던 것이 점차 작은 것을 찾게 되고, 빛깔도 한동안 화려한 색을 찾다가 흰색이나 검은색을 찾다가 다시 연분홍, 주황등 보기에 좋은 화사한 빛깔이 선호되고 있다.​

 

다만 지금 부채는 예전처럼 사랑을 받지 못한다. 선풍기나 에어컨이 많이 갖추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곧 초복이지만 8월 중순 말복까지 한참 지는 더위가 닥쳐오면 전기요금이 무서워 집안에서 에어컨을 못 켜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 분들에게는 여전히 부채가 소용된다. 그러려면 부채도 단순한 것보다는 뭔가 멋진 글귀나 그림이 들어간 것을 사용하는 것이 좋은 만큼 이 여름이 본격화하기 전에 그런 품격 있는 부채의 선물 보내기가 어떠냐고 제안하고 싶은 마음이다.

 

 

동요시인 윤석중 님의 가을부채라는 동요가 있다. 마치 현대에 와서 선풍기와 에어컨에 쫓겨 어디로 도망가야 할지 그 길도 모르는 현대의 부채를 대신해서 신세 한탄을 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날이 신선하니까

이리저리 쫓기네

찢어진 부채.

바람이 잘 난다고

서로 뺏아 부치더니

여름이 다 가니까

다들 미워하지요.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부엌으로

이리저리 쫓기는

가을부채.​

 

가을이 되면 쓰다가 헤어진 부채는 쓰레기통으로 가겠지만 잘 쓰면 편리한 선풍기이다. 또 덥다고 잘 쓰다가 서늘해지면 못 본 체하는 일을 점잖은 우리들이 해서는 안 될 것 같으니 이제 막 꺼내든 부채를 살살 조심스레 쓰면서 내 곁에서 시원한 바람을 잘 불어주는 친구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 뜻에서 부채는 여름철의 량반(凉伴), 곧 서늘함을 주는 동반자일 것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