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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책 만 권의 훈기를 품은, 도산서당

《최인호의 청소년 유림 – 퇴계 이황》, 표시정, 파랑새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10)

옛집 새로 옮겨 이 물가에 지으니

그대 허술한 집 찾아와 어찌 견디냐 묻네

만 권 책의 훈기를 내가 경모하니

한 바가지의 물로 사는 삶에도 진정한 기쁨을 느끼네

스물여섯 해 전 마음먹었던 것을 오늘 되새겨 보매

근심은 동해물로 달려와 측량할 수가 없구나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를 끝으로 공직생활을 일단락짓고, 자기 고향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짓고 읊은 시다. 20대 후반부터 꿈꿔 왔던 소망이 이제야 실현된 것을 기뻐하며, ‘만 권 책의 훈기’와 ‘한 바가지의 물’에도 감사하는 마음을 노래했다.

 

이황은 대학자이자, 문과에 급제하고 ‘직장생활’을 오래 한 관료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항상 학문 쪽에 더 있었던 것 같다. 마침내 온전히 학문에 집중하려 정계 은퇴를 결심하고 지은 서당이 계상서당이었다.

 

이 책, 《퇴계 이황》은 2,500년 유교 역사를 소설로 그려낸 최인호 작가의 《유림》을 청소년용으로 각색한 책이다. 동화작가 표시정이 쉽게 풀어쓰고 최인호가 머리말을 붙였다. 조광조, 공자, 이이 등 유교 사상계의 걸출한 인물을 다룬 최인호의 《유림》 6부작 가운데 여섯 번째 책이다.

 

 

이황이 정계 은퇴를 결심한 데는 넷째 형 이해의 죽음이 미친 영향이 컸다. 책에서는 이를 할반지통(割半之通), 곧 자기 몸을 절반이나 베어내는 고통에 견준다. 이황이 풍기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이해는 권신 이기의 모함을 받아 갑산으로 귀양을 가던 도중 병사했다.

 

살아생전 이해는 아우 황에게 벼슬과 학문을 동시에 할 것을 권유했었다. 그러나 이황은 형의 억울한 죽음을 겪자, 관직에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았다. 원래도 간신들이 좌지우지하는 정국에 참여하고 싶지 않아 물러날 기회만을 보고 있었던 터였다.

 

마침내 그는 사직원을 제출하고 고향인 안동 토계로 돌아와 ‘계상서당’을 지었다. 이황은 세상과 완전히 손을 끊겠다는 뜻에서 마을 이름을 ‘물러날 퇴(退)’를 넣어 퇴계로 고치고, 자신의 호도 ‘퇴계’라 하였다.

 

이황은 처음에는 초당 옆에 서당을 짓고 제자를 받았지만, 제자들이 늘어나면서 서당을 새로 지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는 장소를 물색하다가 마침내 도산 남쪽 기슭에서 적당한 곳을 발견하고, 5년에 걸쳐 ‘도산서당’을 지었다.

 

(p.57)

계상서당에 비바람이 부니

침상조차 가려 주지 못하네

거처 옮기려고 빼어난 곳을 찾아

숲과 언덕을 누볐네

어찌 알았으리 백년토록

마음 두고 학문 닦을 땅이

바로 평소에 나무하고

고기 낚던 곳 곁에 있을 줄이야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종일토록 책을 읽고, 제자들과 대화하고, 명상하며 보냈다. 항상 겸손했으며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다. 아무리 어린 제자라 해도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했고, 함께 학문을 닦는 도반으로 여겼다.

 

게다가 이황은 과거 공부에 매몰된 당시의 교육 현실에 깊은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과거 공부보다는 순수한 학문 그 자체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니, 이황 문하에서 공부하면 과거에 금방 급제할 것으로 기대하고 찾아온 유생들에게는 맞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교육 현실이 입시 과목에만 치중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과거를 위한 공부에만 몰두하는 유생들이 많았다. 심지어 아들 준과 손자 안도도 이황의 강학에 불만을 표시할 정도였다. 이황이 도산서당에서 강학할 때 손자 이안도는 영주에 있는 사설학원에서 과거 공부를 전문으로 지도받고 있었다.

 

이황은 학원에 다니며 암기와 작문에 몰두하는 손자를 보며, “가까이 있는 단 복숭아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쓴 돌배 따러 온 산천을 헤매고 있다”라며 탄식했다. 손자는 나중에야 할아버지의 방식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황은 도산서당에서 학문 자체의 즐거움을 누리며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가 눈이 오는 날 조용히 눈을 감았다. 퇴계의 마지막을 지킨 제자 이덕홍은 《간재문집》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p.166)

12월 8일.

아침에 분매에 물을 주라고 지시하셨다.

유시 초에 자리를 정돈하게 하고는 부축을 받고 일어나 앉아 편안하게 서거하셨다.

이날 날씨가 맑았는데, 유시 초에 갑자기 흰 구름이 집 주위로 몰려들더니 눈이 한 치가량 내렸다. 퇴계 선생이 서거하자 곧바로 구름이 걷히고 눈이 그쳤다.

 

책에서는 이 분매를 옛 정인(情人)이었던 기생 두향이 준 것으로 묘사한다. 이황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맺은 두 사람의 인연은 이황이 단양을 떠나며 끝나버린다. 두향은 퇴계가 작고한 이듬해 강물 위에 몸을 던질 정도로 이황을 깊이 사랑했다.

 

(p.174)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더라

서로 보고 한번 웃은 것 하늘이 허락한 일이었네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봄날은 다 가려 하는구나

 

두향은 퇴계가 살아생전에 써 준 이별시를 흥얼거리며 강선대 바위 위에서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한 마리 나비도 되었다가 한 송이 꽃도 되었다가 정신없이 돌며 춤을 추다가 강물 위로 떨어졌다.

 

이 책은 인물평전이라기보다는 역사소설의 성격이 짙어, 소설적으로 각색된 부분이 많이 보인다. 퇴계 이황이 고봉 기대승과 벌인 학문적 논쟁이나 퇴계가 주장한 주요 학설도 그 얼개를 대략 파악할 수 있어 성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재밌게 읽을 만하다.

 

무엇보다 전반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퇴계의 ‘인간미’다.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인간을 아끼는 휴머니즘이 있었다. 한참 어린 후배가 학문적으로 반론을 제기해도 무조건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는 유연함이 있었고, 가족이나 제자를 대하는 태도도 온화하고 따뜻했다.

 

퇴계의 생애가 궁금하다면, 그리고 그의 후반기 생을 따뜻한 시선으로 따라가고 싶은 독자라면 펼쳐보면 좋은 책이다. 인생 후반기에 ‘벼슬’보다 ‘학문’을 택해 진정으로 기쁨을 누렸던 한 학자의 즐거운 삶에 동화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