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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이 예술가의 선험

선험이 밝은 세계로 나온 곽훈 작가의 <선험의 전이(轉移)>
[이동식의 솔바람과 송순주 264]

[우리문화신문=얼레빗으로 빗는 하루]  ‘Transcendence(트렌센던스)’란 영어단어가 있다. '초월', '탁월' 등의 뜻이다. 이 단어의 형용사는 transcendent인데 이를 '초월하는', '초월적인'이란 뜻으로 푸는 것을 보면 Transcendence란 단어는 뭔가 개인의 존재로부터 초월한 정신세계를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우리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획득한 그 이전의 상태를 의미하기에 '선험(先驗)'이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단어는 몇십 년 전 할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즐겨했다는 초월명상(Transcendental Meditation)이 알려지면서부터 우리들에게도 가까워졌지만, 사실은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1724. ~ 1804)가 새로운 철학의 개념을 제시하면서 쓰기 사작해 이미 유명해진 개념이다. 칸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대상(對象)들에 대한 우리의 인식 방식은 경험 독립적(선험적)으로 가능하다고 하는 한에서 일반적으로 다루는 모든 인식은 선험적(초월적)이다."

 

 

올해 83살의 화가 곽훈 씨가 지난주 대구 문화예술회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는데 전시회의 제목이. <선험의 전이(轉移)>다. 선험이 어떻게 변하고 바뀌었는가를 보여준다는 뜻이리라. 이 미술가에게 선험은 어떤 것이었고, 그는 왜 그것을 추구해 왔는가? 전시회가 궁금해진 이유였다.

 

 

곽훈 씨는 1941년 대구 출생으로서 10살이 채 되지 않았을 나이에 낙동강 변 고향 땅에서 6ㆍ25전쟁을 만나 곳곳에서 경험한 무수한 시신들이 그의 기억에 깊게 들어왔단다. 그렇다면 그것과 그의 땅, 흙, 그의 햇살과 비와 바람도 그의 선험이 되었을 것이다.

 

그 선험을 안고 196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한국 실험미술 1세대로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의 창립멤버로 참여했고 1970년에 첫 개인전을 서울 신문회관에서 열었다.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해 1981년 L.A.시립미술관에서 ‘신진 1981(Newcomers,81)’를 통해 미국화단에 선보이게 됐다. 작가는 미국에서 먼저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대구 문예회관의 5개 전시실을 모두 채운 이 전시회장에 들어서면 사람의 키보다 더 큰 작품들이 벽을 채우고 있다. 거기에는 작가의 의식(意識)을 세로로 펼쳐놓은 듯한 짙은 색들의 엉킴이 있다. 무수한 붓질에 의한 엉킴과 섞임은 작가의 의식 깊은 곳에 있는 경험의 바닥. 곧 선험을 대변한다. 작가 의식의 심연은 미국 땅에서 갖가지 형태의 기운으로 다시 태어났다. 고향의 땅, 고향집의 흙벽, 불을 통해 사발과 그릇으로 태어난 흙에 담긴 자연과 역사와 사람들의 염원, 이런 것들을 과감하게 드러낸 것들이 먼저 미국에서, 그리고는 한국에서도 주목을 받아온 것이다.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세계를 두고 "한국적 정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라고 표현한다. ▷조선시대 도공들이 만들었던 '찻잔' 시리즈 ▷동양적 예술의 바탕인 '기(氣)' 시리즈 ▷인간의 생성과 소멸을 시각화한 '겁(Kalpa), 겁/소리' 시리즈, 그리고 최근에는 ▷바다의 고래를 통해 조상들 생명의 기운을 역동적으로 보여주는 '할라잇(Halaayt)' 시리즈 등 그의 50년의 예술세계가 차례로 펼쳐져 왔다. 그 작품세계는 벽면을 채우는 거대한 작품으로 다른 어느 작가에서도 볼 수 없는 대서사시가 되었다.

 

 

 

곽훈 씨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 한국관이 생겼을 때 한국 대표작가로서 대규모 설치 및 퍼포먼스 작품인 ‘겁/소리-마르코폴로가 가져오지 못한 것’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이 작품은 올해 4월,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개관 30돌을 기리기 위한 특별전으로 베니스 몰타기사단수도원에서 재현됐다. 지난 2021년 이중섭 미술상을 받은 것은 그동안의 작업에 대한 우리 미술계의 인정을 웅변하고 있다.

 

 

 

9월 말까지 이어지는 이번 전시에는 작가의 대표적인 회화 연작들과 조각, 영상, 설치 작업 등 작가의 세계관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자주 공개되지 않았던 1970~80년대 평면 작품들과 ‘페루’ 연작, 그리고 ‘할라잇Halaayt’의 연장선에서 주제를 입체적으로 재현한 대형 창호지 설치 작업 ‘2250m depth’들도 새롭게 공개되고 있다. 최근의 작업인 '할라잇' 작품들에서는 그의 선험이 밝은 세계로 나와 있음을 알게 해준다.

 

 

30년 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 1회 작가로 참여한 윤형근, 김인겸, 전수천, 곽훈 등 4명 가운데 유일한 생존 작가라는 사실에서 보듯 곽훈은 80이 넘은 나이에 가장 왕성하게 작업을 하는 글자 그대로의 노익장 현역이다. 그가 쏟아내는 표현세계는 젊은이들보다도 더 호방하고 역동적이다.

 

 

우리 미술계가 단색화라는 의미 있는 작품 세계를 형성해 보여주었지만, 그는 그러한 평면 작업에 갇히지 않고 50년의 긴 세월 전에 형성된 선험의 세계를 갖가지 방식으로 끊임없이 열어 보여주었다. 그 선험이 50년이란 긴 시간 속에 많은 변화와 변용을 거쳐 화폭을 뚫고 솟아나는 거대한 힘이 되어 전시장을 압도하고 있다. 그것은 한 예술가의 선험이 어떻게 인류의 원초적 보편성과 동시에 민족적 정체성으로 태어나 예술적인 공감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드문 자리이기도 하다.

 

그것으로써 그의 이번 회고전은 대구라는 고향에서만이 아니라 한국을 대표하는 원로작가로서의 곽훈의 면모를 세상에 다시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그것이 전시를 본 솔직한 느낌이자 감동이다.

 

 

 

 이동식

 

전 KBS 해설위원실장

현 우리문화신문 편집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