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윤옥 기자]


“사랑과 증오는 결합하여 연꽃이 되고 후회와 이기심은 결합하여 사슴이 되고 충돌과 분노는 결합하며 날으는 물고기가 된다. 행복과 소란은 결합하여 아름다운 새가 되고 오만과 욕심은 결합하여 춤이 된다. 나의 작품에서 완전한 자유란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는 것이다.”
제주 서귀포 ‘왈종미술관’ 1층 전시실에 들어서면 이왈종 화백의 마음이 담긴 글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다. 탁 트인 전시공간이 아니라 미로처럼 좁고 아담한 전시관 안에는 ‘아기자기하고 알록달록한 빛깔의 크고 작은 그림과 조각 작품’ 들이 가득하다.
제주에 그렇게 드나들었어도 왈종미술관을 찾은 것은 처음이다. 2013년 5월 31일에 개관한 미술관이고 보니 올해로 치면 개관 25년째다.
“제주에 정착하여 20여 년이 넘게 그동안 나는 <제주생활의 중도와 연기>란 주제를 가지고 한결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도대체 인간에게 행복과 불행한 삶은 어디서 오는가 만을 깊게 생각해왔다. 인간이란 세상에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 덧없이 지나가는 나그네란 생각도 해보았고 세상은 참으로 험난하고 고달픈 것이 인생이라는 것도 생각해 봤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
사랑과 증오, 탐욕과 미움, 번뇌와 자유는 어디에서 오는가? 그 슬픔과 기쁨, 행복과 불행 모두가 다 마음에서 비롯됨을 그 누구나 알지만 말처럼 그렇게 마음을 비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러한 마음이 내재하는 한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을 하면서 서서히 흰머리로 덮여가는 내 모습을 바라본다. 행복과 불행, 자유와 구속, 사랑과 고통, 외로움 등을 꽃과 새, 물고기, TV, 자동차, 동백꽃, 노루, 골프 등으로 표현하며 나는 오늘도 그림 속으로 빠지고 싶다.” - 2013년 5월 서귀포 왈종 -
좀 긴 내용이지만 경기도 화성 출신의 이왈종 화백이 제주 서귀포에 둥지를 틀고 그림을 그리게 된 사연이 담겨있어 그대로 옮겨보았다.
“살다 보니 새로운 조건이 갖춰지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또 없어지는 자연과 인간의 모습들에서 연기라는 삶의 이치를 발견하고 중도와 더불어 그것을 작품으로 표현하려고 하루도 쉬지 않고 그림 그리는 일에 내 인생을 걸었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공감 가는 글귀다. ‘중도(中道), 연기(緣起)’와 같은 불교 철학의 이념과 작품이 어떻게 연결되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을 갖고 1층, 2층 전시실을 비롯하여 3층 옥상 전시작품까지 꼼꼼하게 둘러보았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중도의 개념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이른바 ‘회색지대’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런 시각으로 작품을 감상한다면 약간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불교의 중도(中道)란 양극단을 떠나 어느 한쪽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중도란 고락중도(苦樂中道)에서 나온 말로 석가모니가 직접 깨달은 길(道)이기도 하다. 29살에 출가하여 35살에 깨달음을 얻어 각자(覺者)의 길을 걸은 석가모니는 6년 동안 가혹한 수행을 했다. 그러나 그 고행이란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일 뿐 참된 인생 문제의 해결책은 되지 못했다. 왕자 출신인 그는 출가 전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물질적 풍족함 속에 살았다. 하지만 출가해서 보니 출가 전의 풍족한 삶도 출가 후의 고행(苦行)도 모두 한편에 치우친 극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중도의 길이라면 왈종미술관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 하나 하나에 그런 심오한 중도(中道)의 세계가 무한히 펼쳐지고 있음을 보았다. 특히 3층에는 작가의 이러한 세계관을 응축시켜놓은 작품과 글씨들도 눈에 띈다. “일체유심조외무법(一切唯心造外無法), 중도관(中道觀)”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서귀포에 그동안 내가 살던 집을 헐고 큰 작업실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도자기를 빚어 건물모형을 만들었다. 그게 어느덧 3년 전 일이다. 우연히 스위스 건축가 Davide Macullo와 한만원 건축설계사와 공동 작업을 하여 도면을 수정하기를 2년, 그리고 터를 파면서부터 나는 매일 건축 현장에서 함께했다. 처음엔 새들이 날아와 놀곳 없어진 것이 아쉬웠지만 예전 뜰에 있던 나무들을 그대로 옮겨다 심었으니 봄이 오면 새들도 기억하고 찾아오지 않을까? 작업실뿐 아니라 전시공간과 어린이 미술교육실까지 마련하였으니 이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20여 년간 나에게 행복을 주었던 제주 서귀포에 작은 선물이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를 바란다. 이 건물이 이루어지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신 분들께 두 손 모아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 2013년 5월 31일 개관 서귀포 왈종 -
예술가가 자신이 좋아하는 곳에 작업실을 갖추고 작업에 몰두할 수있다는 것은 ‘지복(至福)을 누리는 일’ 일 것이다. 거기에 전시공간과 어린이 미술교육실까지 갖추고 있다니 작가의 말처럼 '더 바랄 것이 없는 삶’ 일 듯 싶다.
그래서일까? 그제(29일) 들른 서귀포 왈종미술관에서 느낀 작품들은 마치 시골 외할머니집에 걸려 있던 ' 아주 편안한 옛그림' 처럼 느껴졌다. 난해한 그림들과 감정이입이 잘 안되는 생경한 도회지 화랑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었던 왈종미술관에서의 하루는 아주 행복한 시간이었다.
<왈종미술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 214번길 30 (동홍동)
064-763-36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