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이상훈 전 수원대 교수] K 교수가 속한 공과대학에서 시작된 스파게티 붐은 자연대학을 거쳐, 경상대학을 찍고 인문대학까지 확산하였다. S대 남자 교수들은 모두 미스 K의 미모에 반한 모양이었다. 어떤 교수는 미스 K에게서 휴대폰 번호가 적힌 명함까지 받아왔다고 명함을 보여 주었다. 경영학 박사인 어떤 교수는 미녀식당의 경영 컨설팅을 해주기로 약속했다고 자랑하였다. 어떤 교수는 미스 K가 자기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떤 교수는 미스 K가 자기에게 “전화 한번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자랑하였다. K 교수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K 교수는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잘들 놀고 있네."
그날 밤 K 교수는 야간 수업이 끝난 뒤에 습관처럼 미녀 식당으로 갔다. 예상했던 대로 손님은 한 사람도 없었다. 미스 K는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비가 많이 내리네요.”
“맞아요. 오늘 하루 종일 비가 내려 장사를 공쳤습니다.”
“벼농사를 위해서는 비가 내려야 좋습니다. 농촌에서는 못자리를 내야 하니까요. 그런데 하루 종일 비가 내려서 쓸쓸했죠?”
“네, 조금은... 그전에는 쓸쓸하면 못 견뎌했는데, 요즘에는 그렇지는 않아요.”
“은정씨가 쓸쓸해 할 것 같아서 그냥 퇴근할까 하다가, 비도 오고 해서 들렸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교수님도 비 오는 밤에 갈 곳이 있으니까 좋지 않아요?”
“그렇기는 해요. 지금 가면 초저녁잠이 많은 아내는 자고 있을 겁니다.”
그녀는 요즘 외로움을 느낀단다. 가끔 서울에 가서 친구들을 만나기는 해도 여전히 외롭단다. 일요일 교회에 가서 예배에 참석해도 여전히 외롭고 또 쓸쓸하단다. 멋진 영화 시나리오를 다시 한번 쓰고 싶단다. 1985년에 상영되었던 영화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의 시나리오는 그녀가 직접 썼다고 한다. 영화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인지, K 교수가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영화다.
식당일에는 별로 만족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무언가 온몸을 바쳐 열심히 추구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식당일은 그렇게 도전적인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K 교수가 약간 긴장을 하며 조심스럽게 미스 K의 가족에 관해서 물어보았다.
“애들이 있지 않나요?”
“고등학교 다니는 아들과 중학교 다니는 아들이 있는데, 모두 미국에 있어요. 방학 때나 한번씩 만나는 걸요.”
“남편은 어디 계시나요?” K 교수가 오랫동안 참고 참아왔던 핵심적인 질문을 던졌다.
“아, 그 아저씨도 미국에 있어요.”
여전히 그녀는 남편의 호칭을 ‘아저씨’라고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남편 이야기는 꺼내지 않았다. K 교수가 차마 “그 아저씨와 이혼했습니까”라고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다. 미스 K의 이혼 여부에 대해서는 의심은 가지만 이혼했다고 결론을 내릴 수는 없었다.
K 교수는 화제를 돌려서 미스 K에게 다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은정 씨는 일부일처 제도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갑자기 왜 그런 질문을?”
“요즘 이혼하는 부부가 너무 많아졌어요.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일부일처제도가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세요?”
“글쎄요. 무어라고 해야 하나…. 너무 어려운 질문이네요....”
K 교수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부일처 제도에 대해서 자기가 연구해 본 적이 있다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한 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죽을 때까지 헤어지지 않고 사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설혹 부부가 백년해로한다고 해도 그사이에 외도 한번 없이 평생을 사는 일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지금 우리가 유지하는 일부일처 제도는 비교적 최근에 나타난 제도로서 서양의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뒤에 정착한 제도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은 경제적 여유가 있으면 첩을 두는 풍습이 만연했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이후에도 ‘첩’이나 ‘소실’ 또는 ‘세컨드(second)’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일부다처제도가 남아 있었다. “두 집 살림한다”라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지탄받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61년 군사혁명이 일어난 뒤에 당시 박정희 혁명정부는 첩이 있는 공무원은 모두 공직에서 물러나게 했다. 당시 내무부에서만 510명의 축첩 공무원이 적발되어 쫒겨났다. 박정희 장군이 우리나라 일부일처 제도의 정착에 크게 이바지를 한 것이다.
(법률적으로는 1953년에 통과된 간통죄 조항이 일부일처제도 정착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아내가 있는 남자가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다가 적발되면 간통죄로 감옥살이해야 했다. 그러나 간통죄는 인간의 자유 그리고 개인의 행복추구권과 어긋난다는 근거로 2015년에 폐지되었다. 간통은 도덕적으로는 나쁘지만, 법률적으로 범죄는 아니라고 규정한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간통 같은 불륜에 대해서 이전보다 조금은 더 관대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불륜과 사랑은 무엇이 다를까? 많은 시인과 음악가들이 사랑을 예찬한다. 수많은 소설과 노래와 그림의 주제는 사랑이다. 사랑은 대부분 맹목적이고 때로는 나쁜 결과를 내기도 한다. 그렇지만 불륜도 시작은 사랑이 아닐까? 굳이 불륜을 미화한다면 어느 유행가 가사에서 나오듯이 ‘아름다운 죄’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