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15 (월)

  • 흐림동두천 2.0℃
  • 구름조금강릉 8.0℃
  • 흐림서울 4.5℃
  • 흐림대전 6.2℃
  • 맑음대구 8.8℃
  • 맑음울산 9.5℃
  • 구름조금광주 8.8℃
  • 맑음부산 10.7℃
  • 구름조금고창 8.7℃
  • 구름많음제주 11.2℃
  • 구름많음강화 4.4℃
  • 구름많음보은 5.0℃
  • 흐림금산 6.2℃
  • 맑음강진군 9.4℃
  • 맑음경주시 8.5℃
  • 맑음거제 7.9℃
기상청 제공
상세검색
닫기

우지원의 우리문화책방

조선 임금은 어떻게 장례를 치렀을까

《효심을 위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 글 임소연, 문학동네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p.8)

정적이 흐르는 궁궐의 밤, 왕세자와 신료들이 슬퍼하는 가운데,

죽음이 가까워진 왕이 유언을 남깁니다.

종묘와 사직을 잘 보존하고 온 백성이 평안한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왕의 목소리에는

왕실과 백성을 걱정하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왕의 마지막 당부에 왕세자와 신료들이 옥체를 보존하시라

목 놓아 외치지만 결국 왕은 죽음을 맞습니다.

 

사극에서 한 번쯤, 내시가 궁궐 지붕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소리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는 ‘상위복’이라 하여 ‘상위’는 임금, ‘복’은 돌아오라는 뜻으로 임금의 혼령이 자신의 옷을 알아보고 돌아오길 바라는 의식이었다.

 

막연하게 사극 속 한 장면으로 남아있던 이런 임금의 ‘죽음’은, 《효심을 위해 지은 왕의 무덤, 조선 왕릉》에서 생생히 다루어진다. 임금이 눈을 감은 뒤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거대한 왕릉에 묻히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소상하게 담았다.

 

 

유교의 예법에서는 적어도 5일 동안 임금의 혼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기간에는 임금이 죽지 않고 돌아올 수도 있다고 여겨 왕세자가 즉위하지 않았다. 5일이 지나면 그제야 왕릉으로 모시기 전까지 관을 두는 전각인 빈전으로 시신을 옮겼다.

 

임금과 왕후의 장례인 ‘국장’은 절차가 60가지가 넘을 만큼 복잡했다. 왕릉에 모시는 발인은 관에 모신 뒤 5개월 뒤에 치러졌다. 왕릉을 만드는 데 수천 명이 필요했던 까닭이다. 평범한 사람의 상례도 쉽지 않은 만큼, 한 나라를 다스린 임금의 상례는 더욱 까다로웠다.

 

오늘날의 ‘임시위원회’쯤 되는 위원회도 꾸려졌다. 빈전도감, 국장도감, 산릉도감이 설치되고 각 도감의 책임자로 으뜸 직급의 조정 신료가 임명됐다. 빈전도감에서는 왕릉으로 모시기 전까지의 실무를, 국장도감에서는 왕의 관을 왕릉으로 모시는 ‘발인’을 담당하고 전체 장례를 총괄했다. 산릉도감에서는 왕릉 조성을 전담했다.

 

국장을 치르는 가운데 즉위식은 간소하게 치러졌다. 빈전을 지키던 세자는 선왕이 세상을 떠나고 5일이 지난 다음 날 왕위에 올랐다. 즉위식은 기쁜 날이라 화려했을 것 같지만, 선왕의 장례가 여전히 치러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법에 따라 악기는 설치해도 연주하지 않았다.

 

임금은 승하한 뒤 자신의 업적을 기린 묘호와 시호를 받았고, 왕릉의 이름인 능호도 그때 결정됐다. 일반적으로 세종, 정조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임금의 이름이 이때 정해지는 묘호이고, 시호는 살아생전의 공덕을 함축해서 지어졌다.

 

(p.21) 영조의 자리가 비어 있는 정성왕후의 홍릉

서오릉에는 빈 옆자리가 눈에 띄는 능이 하나 있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왕비 정성왕후의 홍릉입니다. 정성왕후는 늘 미소 띤 얼굴로 영조를 맞아 주고, 궁궐의 어른들을 극진히 모셨다 합니다. 영조는 먼저 떠난 정성왕후의 능을 만들면서 오른쪽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그러나 영조는 두 번째 왕비 정순왕후와 동구릉에 있는 원릉에 묻히게 되었고, 결국 정성왕후의 옆은 영원히 빈자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조선 왕릉 42기 가운데 북한에 있는 태조의 첫 번째 비 신의왕후의 제릉과 정종의 후릉, 영월에 있는 단종의 장릉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모여있다. 왕릉은 도성 사대문 밖 100리(약 40km)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임금이 자주 참배하기 쉽기도 했지만, 나라에 위급한 일이 생겼을 때 다시 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거리를 고려한 것이다.

 

임금 가운데 특별히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던 이는 세조다. 왕릉의 내부를 만드는 방식에는 돌을 쌓아 만드는 석실과, 석회를 다져서 만드는 회격이 있었다. 회격은 석실에 견줘 적은 인원으로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조선 초기까지는 석실로 만들어졌다. 세조는 백성들이 엄청난 무게의 돌을 옮겨야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자신의 무덤은 회격으로 만들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 뒤부터 회격으로 바뀌었다.

 

관을 능까지 모시고 가서 안치하는 발인은 많게는 2,000명까지 동원되는 대규모 국가행사였다. 발인하기 전에 국장 행렬의 배차를 그린 발인반차도를 그려 임금과 신하들은 미리 절차를 숙지하고 연습했다. 후대에서도 절차 때문에 허둥지둥하지 않도록 의궤에 실어 기록으로 잘 남기기도 했다.

 

(p.31) 봉분을 지키는 석양과 석호

무석인과 문석인이 서 있는 곳을 지나 왕릉 제일 윗부분에 왕이 묻힌 봉분이 있습니다. 그 주위에는 동물 조각상들이 봉분을 등에 지고 바깥쪽에 서 있는데, 바로 신성한 동물인 양 모양의 석양과 용맹한 호랑이 모양의 석호입니다. 석양과 석호는 한 마리씩 번갈아 가며 봉분 밖을 호위하듯 둘러싸고 있습니다.

 

국장을 마치면 국장도감, 빈전도감, 산릉도감에서 오늘날의 결과보고서라 할 수 있는 ‘의궤’를 만들었다. 국장의 모든 과정을 세세히 기록했으며, 능참봉이라는 벼슬을 가진 사람이 왕릉을 관리하면서 생기는 일들도 기록으로 남겼다. 능참봉은 왕릉 입구에 있는 재실에 거주하며 절기마다 제례를 지내고, 왕릉의 지형을 그린 명당도와 관리 수칙을 적은 능지를 남겼던 왕릉 전문 관리인이었다.

 

42기의 조선 왕릉이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잘 남아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선왕의 장례를 성심성의껏 치렀던 효심, 왕릉을 만들고 나서도 꾸준히 참배하고 관리하는 데 힘썼던 세월이 모여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쾌거를 이루어냈다.

 

죽음은 누구나 피할 수 없고,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은 왕릉이 조성되기까지 있었을 수많은 사람의 노고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책이다. 평소 조선 왕릉을 가보았거나,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독자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