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권 제10 신라본기 제10에 보면 “여름 4월에 폭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기와를 날렸다. 서난전(瑞蘭殿)의 발이 날려간 곳을 모르며, 임해문(臨海門)과 인화문(仁化門) 두 문이 무너졌다.”라는 기록이 보여 이미 신라 때에도 발은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태종 22권, 11년(1411) 11월 1일 기록에는 "궁중에 모두 갈대 발[葦簾]을 쓰고 또 선 두르는 것을 없애라고 명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새 대궐의 발을 베[布]를 써서 선을 꾸몄으므로 임금이 노하여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라는 기록도 나옵니다. 이어서 숙종 4권, 1년(1675) 10월 20일) 기록에는 “동양 옹주(東陽翁主)의 집이 얕아서 이웃집에서 보이는 곳에 있었으므로, 옹주가 그 집을 사기를 청하자, 선묘께서 특별히 갈대 발[葦簾]을 내려 주어서 가리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많은 임금이 검소한 자세로 지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름철 한옥에는 꼭 발을 걸어두었습니다. 발은 직접 들어오는 햇볕을 가리기도 하고 안쪽 풍경을 가리기도 했으며 문을 활짝 열어 둘 때보다 발을 침으로써 시원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발의 재료로는 대나무를 곱게 갈라 만든 대발, 갈대로 엮은 갈대발, 삼베로 만든 삼베발 등이 문헌에 보이며 살랑거리며 흔들리는 발 사이로 들어오는 바람은 운치가 있습니다. 발이 걸린 대청마루에서 나물 먹고 물 마시고 목침을 베고 누워 솔바람소리를 듣는다면 이거야말로 품위 있는 여름나기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