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에 나서 소나무에 죽는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로 만든 집에서 태어나고, 태어난 아기를 위해 솔가지를 매단 금줄을 쳤으며, 소나무 장작불로 밥을 해 먹었고, 아궁이에 불을 때서 잠을 잤다. 가구를 만들고, 송편을 해 먹었으며, 솔잎주와 송화주(松花酒:송화를 줄기 채로 넣고 빚은 술), 송순주(松筍酒:소나무의 새순을 넣고 빚은 술)를 빚었다. 송홧가루로 다식(茶食:차를 마실 때 먹는 한과)을 만들어 먹고,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복령(茯笭)은 약제로 쓰이며, 송이버섯은 좋은 음식재료이다.
또 소나무 뿌리로 송근유(松根油)라는 기름을 만들어 불을 밝혔고,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인 송연(松烟)으로 먹(墨)을 만들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송진이 뭉친 호박으로 마고자 단추를 해 달았고, 흔들리는 소나무의 운치 있는 맑은 소리를 즐겼으며, 소나무 그림 병풍을 펼쳐 두고 즐겼다. 그리고 죽을 때는 소나무로 짠 관에 묻혀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마지막 순간까지도 소나무에게 신세를 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 지명가운데 소나무 송자가 들어가는 곳이 681곳이나 된다는 것도 우리 민족이 소나무와 함께 살아간 반증일 것이다. 우리 민족은 소나무를 장수(長壽), 기개(氣槪), 성실(誠實), 지조(志操), 생명(生命), 순결(純潔) 등으로 을 상징하는 나무로 본다.
소나무가 궁궐의 건축재로 쓰인 까닭?
▲ 황장목의 수심 나이테가 조밀하다 ⓒ2001 정동주
경복궁 등 조선시대 궁궐은 모두 소나무로만 지었는데 이는 소나무가 나무결 이 곱고 나이테 사이의 폭이 좁으며 강도가 크고, 거기다가 잘 뒤틀리지 않으 면서도 벌레가 먹지 않으며 송진이 있어 습기에도 잘 견뎠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복궁 복원 공사에도 당연히 소나무만 쓰기로 했는데 이 공사에 소요되는 나 무가 원목으로 약 200만재(11톤 트럭으로 500대)에 해당하는 양이라 한 다. 공사에서 쓰일 목재가 부족하자 중국의 백두산 미인송을 수입하기로 했으나 우리 토종 소나무보다 강도가 약하여 포기했다고 하며, 요즘 외국에서 수입하는 적송은 우리나라 적송 보다 강도가 대단히 약하여 목재로 사용하기가 부적합하다고 한다.
나무의 속 부분이 누런빛을 띠는 소나무만 건축재로 쓰고, 죽은 사람의 관을 짰다고 한다. 또 당시에 가장 중요한 수송수단이던 배를 만드는 조선재로도 쓰였다. 따라서 이렇게 색이 누런 나무를 '황장목(黃腸木)'이라 불렀으며 '황장금표' 등의 표식을 세워 '황장목'을 보호하고 육성하는데 힘썼다. 또한 정조시대에는 송목금벌(松木禁伐)이라 해서 소나무 베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하였다.
인격이 부여된 소나무, 특별한 소나무
▲ 석송령 : 세금을 납부하는 소나무 ⓒ2001 임경빈
석송령 : 경북 예천시에 있는 석씨 성의 송령이라는 소나무는 사람처럼 종합토지세를 납부하는 세계 유일의 나무이다. 지금으 로부터 약 70년 전에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이란 노인이 재산을 물려줄 후손이 없자 이 소나무에게 토지를 물려주게 된 것이 연유가 되었다. 석송령 소유의 토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해마다 이 마을 학생들에게 장학금도 지급하고 있다.
▲ 정이품송
속리산 들머리에 있으며, 벼슬을 가진 유일한 소나무. 수년 전에 가지가 잘려나가 품위
가 많이 손상되었다.
▲정부인 소나무 정이품소나무와 내외지간
정이품송 :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속리산 들머리의 '정이품송(正二品松)'은 600년 동안 벼슬을 유지하고 있다. 악성 종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이 절의 복천암 약수가 좋다고 하여 찾아가던 중, 한 소나무 밑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소나무 가지에 가마가 걸릴까 봐 "연 걸린다"라고 꾸짖자 이 소나무가 가지를 번쩍 들어 무사히 지나가게 해주었다. 뒷날 세조는 이 소나무에 정이품의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은 몇 년 전에 대린 폭설로 가지가 잘려나가 위엄스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