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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41. 문화 지체의 현상은 전통을 경시하는 풍조에서부터 비롯된다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오래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김 모씨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대강 이러한 내용이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조그맣고 흰 항아리가 하나 있었다. 그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의 집에는 이런 종류의 항아리들이 몇 개 있었다고 한다. 가족 중에서는 특히 조부가 그 물건에 관심이 많으셔서 매일같이 그 항아리들을 닦고 매만지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누가 손이라도 댈라치면 걱정을 하시며 지극 정성으로 보존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부께서 돌아가신 다음, 아버지의 사업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그의 가족은 작은 집,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다가 드디어는 남의 집 방 한 칸에 신세를 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사는 동안 가족들의 관심 밖으로 돌려진 항아리들의 보관문제는 관심 밖의 일이 되어버렸다. 조부께서 그토록 아끼시던 항아리들은 관리소홀로 하나 둘 깨지고 조각이 나 버렸다. 남아 있는 것은 오직 한 개뿐이다.

 

가장이 된 김씨는 집안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고 생활에도 여유를 되찾게 되었으나, 그와 어려운 시대를 함께 살아온 흰 항아리는 몸통 부분에 금이 가 있고, 윗부분은 이가 빠져 온전치 못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부인이 새로 이사한 집에 친지들을 초대하였는데, 그 중 한 친구가 다른 물건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초라해진 그 항아리에만 시선을 보내더니 “이것은 그 생김새나 빛깔이 매우 독특하여 보통의 항아리가 아닌 것 같으니 전문가의 감정을 받아보는 것이 좋겠다.”라는 충고를 해 주고 갔다는 것이다. 아내의 말을 전해들은 김씨는 곧바로 이 분야의 전문가를 찾아나섰다.

 

 “이것은 조선 전기의 백자가 틀림없소!” “이 귀중한 물건을 왜 이렇게 함부로 굴리셨소?”

 “색채의 아름다움, 번잡을 초탈한 소박미를 보시오, 사람의 마음을 정적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그릇이 아니오? .”  “주인을 잘못 만난 불쌍한 문화재.”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그 항아리가 조선시대의 백자임을 증명해 주었고 거액으로 흥정을 해 왔지만, 그는 얼굴을 못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물론 귀한 것으로 확인이 되었으니 지금은 정성을 다해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이것이 전부이지만, 그의 이야기가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 여운을 남기고 있다.

 

“만일 볼품없는 옛 항아리라고 생각해서 소홀히 다루다가 깨뜨리기라도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귀중한 문화재 한 점은 영원히 사라졌겠지.”


“혹시 누구에게 헐값에 팔아 버렸다면 그 항아리의 운명은 어찌 되었을까?”


“주인을 잘 만나 살아 있을까, 아니면 조각이 나서 없어졌을까?”

 

그가 뒤늦게라도 항아리의 가치에 대해 수소문해 보고 조선 초기의 백자라는 것을 확인한 용기는 무지를 이겨낸 다행한 결과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위의 김씨와 같은 무지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은 수백 년 전의 고서(古書)를 폐휴지로 내던지거나, 고금(古琴, 칠현금으로 불리는 고대 중국 악기)을 나무토막으로 취급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수천 년 된 문화재들을 땅속에 묻어둔 채, 그 위에 새 아파트를 짓기도 한다. 무지가 빚어내는 가치의 혼란이 얼마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가치의 혼란 탓에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범주에는 전통음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학교 교육을 통하여 한국인들의 고유 언어와 역사를 깨우치고 그 필요성이나 정신을 강조해 온 것처럼, 우리의 음악도 학교교육을 통해 강조되어야 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오히려 소홀히 취급되어 왔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학교 음악교육에서 자국의 전통음악을 과소평가한 교육정책을 세우고 있거나 교과과정에서 제외하다시피 하고 서약음악 일변도로만 지도해 온 과거의 음악 교육은 앞에서 만났던 무지한 김씨 부류의 졸속 정책이며 과정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졸속정책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우리의 가락과 장단도 모르는 채 서양음악 문화의 노예가 되어 감정 없는 노래를 부르고 어설픈 몸동작을 해오고 있는 것인가!

 

가르치고 배울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지 않는 한, 이와 같은 풍토는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개발도상 국가들이 흔히 경험하게 되는 문화 지체의 현상이 나라마다 전통을 경시하는 풍조에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깊이 새겨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