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악이란 항아리를 들고 다섯 번째 감정가인 캠브릿지 대학의 조나단 컨디트(Jonathan Condit)박사를 만나 보도록 한다.
“한국음악에서 또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특색은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등 매우 풍부한 다양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광범위한 감정 묘사가 있는 것이다. 궁중음악은 한없이 우아하고, 위엄 있고, 세련되고, 품위 있고, 진진하며 아주 아름답다. 반면에, 민속음악은 정서적이고 정열적이다. 궁중음악이 오랜 전통이 있듯이 민속음악 역시 뿌리깊은 전통이 있다. 차이를 말하자면, 민속음악은 더욱 대중에 침투되어 있어 처음 들을 때 이해하기가 쉽고, 반면에 궁중음악은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깊이와 참뜻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수제천과 같은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음향 자체도 매우 인상적이고 위엄 있으며 강렬하지만, 진미를 알려면 여러 번 들어야 한다. 한국과 서양의 음악을 대비할 때 한국음악은 아주 느린 속도와 동시에 아주 빠른 속도를 갖추었는데, 서양에선 그렇듯 느린 것은 없다. 한국음악은 자연에 좀 더 가까운 것 같고 서양음악은 인공적인 것 같다”
컨디트 박사는 한국에 와서 오랫동안 정악, 민속악 등 한국의 전통음악을 기초부터 공부하였고 국악인들과의 폭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국악인들이 공연하는 현장에는 항상 그가 함께하였던 현장 경험이 매우 풍부한 사람이다. 특히 국립국악원 대극장과 소극장에서 하는 모든 국악공연은 거의 빠지지 않고 참석할 정도여서 그곳에 가면 언제든지 그를 만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국악과 서양음악의 차이는 물론, 아악과 민속악의 차이도 명쾌하게 정의 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설명으로 양자의 개념을 대략적으로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위의 논평에 나오는 ‘수제천’이란 곡은 아악의 대표적인 합주곡으로 원곡의 이름은 정읍(井邑)이다. 정읍은 처용무의 반주 음악으로도 사용되는 이유로 신라 헌강왕(憲康王) 당시의 처용설화에 그 기원을 대기도 하고, 백제의 정읍사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그 음악형식이 고려가요의 형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고려시대의 춤과 함께 쓰이던 음악이 기악화 되어 오늘날까지 전래하고 있는 악곡이라 하겠다.
『악학궤범(樂學軌範)』에도 무고(舞鼓)춤 반주에 정읍 만기(慢機)ㆍ중기ㆍ급기를 한다고 설명하면서 창사(唱詞), 즉 춤을 추다가 노래를 부르는데 정읍사를 부른다고 소개하고 있다.
수제천은 모두 4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주에 걸리는 시간은 15분가량이다. 총 장단 수는 20장단이며 장단형은 쌍(雙) 편(鞭) 고(鼓) 요(搖)의 불규칙적인 리듬의 진행이다. 향피리ㆍ대금ㆍ해금ㆍ아쟁(牙箏)ㆍ소금ㆍ장고ㆍ좌고 등의 관악기 위주의 편성이다.
연주형식은 향피리가 주선율을 연주하다가 한 장단을 끝내면, 나머지 악기들이 그 뒤를 이어 다음 장단으로 연결해주는 연음형식(連音形式)의 진행이 특징이다. 모두 20장단이지만 무정형으로 길게 늘여, 늘어 질대로 늘어지면서 끊어지지 않는 가락 속에는 면면히 흘러온 우리의 역사가 숨어있고, 은근과 끈기의 민족성이 담겨 있음을 느끼게 되는 곡이라 하겠다.
국악의 이론적 연구, 학문적 체계를 세운 원로학자 이혜구 박사는「수제천의 조(調)와 형식」이란 논문을 발표하면서 악곡을 분석한 다음 “이런 수제천의 분석도, 그 광대하고 부드럽고 미묘한 변화를 가진 걸작 중의 걸작을 설명하기엔 부족하다. 수제천은 마치 광란의 속세를 벗어나 하늘 높이 솟아 춘광에 빛나는 태산과도 같기 때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갖가지 음악적 요소도 특징적이지만, 일정치 않은 불규칙 장단 속에서도 많은 연주자가 하나같이 호흡을 맞추어 나가는 모습은 마치 물이 흐르고 바람에 구름이 움직이듯 자연의 형상 그대로라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