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문화재 1호인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국악 합주곡으로 유명한 영산회상, 또는 수제천과 같은 기악 합주곡을 감상하게 되는 경우, 대부분 감상자는 그 곡의 처음이나 끝이 모두 같은 가락처럼 들려서 시작부분과 끝 부분을 구분하기 어렵다고 실토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라 짐작이 된다.
그런데 만일 악보를 읽을 줄 아는 감상자가 악보를 통해 선율의 흐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면서 그 곡을 감상한다면 재미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냐하면, 선율의 진행을 악보로 확인할 수 있기에 어떻게 시작하고 중간에 어떻게 변하며 또한 끝나는 선율은 어떻게 진행되는가 하는 점을 악보 상에서 확인하며 음악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악보를 읽어 나가는 능력, 즉 독보능력은 국악과 친숙해지는 좋은 방법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민속음악은 악보 없이 구전심수의 방법으로 전해오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또한 재미있기 때문에 특별히 악보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있겠지만, 정악계열의 음악들은 악보로 전해져 오는 것들이 많은 편이어서 악보에 의존도가 높다 하겠다.
과거로부터 전해오는 악보의 기보방법은 여러 형태로 매우 다양하다. 이러한 자료들은 음악학 연구를 위해서나 또는 시대에 따른 음악의 변천과정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록으로 남겨야 후세들이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고, 그림으로 남겨야 형태를 알 수 있으며 음의 고저나 길고 짧음을 악보로 남겨야 그 음악이 올바르게 전승될 수 있는 것이다. 필자가 동남아시아, 또는 서양의 여러 나라를 방문할 때 현지의 유명 음악인들에게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질문이 “한국은 어떤 독자적인 악보가 있습니까?” “중국이나 일본의 악보와 다른가요. 같은가요?” 또는 “한국에서도 5선보를 사용하고 있지요?” 등이었다.
그들의 음악을 독자적으로 기록하는 방법이 있듯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대한민국인데, 어찌 한국의 전통음악을 문자나 기호로 보존해 온 방법이 없겠는가! 한류가 일기 전 한국에 대한 충분한 정보가 없었기에 오는 의문이라고 생각된다.
5선을 그려놓고 높은음은 위쪽에 낮은음은 아래쪽으로 기호를 만들어 쓰는 서양의 5선보와는 대조적으로 문자, 혹은 기호 등을 써서 음의 높낮이와 길고 짧음을 표시해 온 방법이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어떤 악보는 국악에 쓰이는 12음의 이름 첫 자만을 따서 쓰는 것도 있다.
악보 상에서는 앞글자만을 따서 쓰기 때문에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의 기보법보다는 명확한 음 높이를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나 율명의 첫 글자 이외에는 다른 표시가 없어서 곡의 빠르기나 음의 길이가 불분명한 단점도 있다. 그래서 이 율자보를 쓰는 악곡은 대개 각 음의 길이가 일정하거나 또는 빠르기가 일정한 음악들이다. 현재도 성균관 안에 있는 공자의 사당, 문묘의 음악은 율자보에 따라 연주되고 있다.
12음의 첫 글자만 알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지극히 단조로운 악보이지만, 음과 음 사이에 숨어 있는 흐름의 표현이나 해석은 연주자의 상상력을 깊고 넓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기보법은 쓰고 읽기는 쉬워도 음악적 해석은 쉽지 않은 기보법인 셈이다. (덧붙인 악보)
또 어떤 것은 율명이 어려워 10개의 아주 쉽고 간단한 글자로 줄여 쓴 기보 방법도 있다. 그런가 하면 악기의 소리를 흉내 내 적어 놓은 구음(口音) 악보도 있다. 이를 육보라 부른다.
거문고나 가야금과 같은 현악기들은 명주실을 꼬아서 나무판에 걸고 소리를 내기 때문에 줄의 굵기와 가늘기에 따라 높고 낮은음이 구별되고, 피리나 대금과 같은 관악기들은 대나무 관(管)을 통해 소리를 내기 때문에 관의 길이나 굵기에 따라 소리의 빛깔이 각각 다르다. 그러므로 육보는 하나의 통일된 악보가 아니라, 관악기와 현악기가 다르고 줄을 마찰시켜 내는 찰현악기와 북 장고와 같은 타악기가 각각 달라서 각기 다른 육보를 갖게 된다.
전통적인 육보의 대표적인 예가 <덩, 둥, 당>으로 표현되는 현악기 육보와 <나, 리, 로> 등의 관악기 육보이다. 그 외에도 해금은 ‘가’ ‘게’ ‘기’ ‘고’ ‘구’로 구음하고 있으며 장고는 ‘떵’ ‘덕’ ‘쿵’ 꽹과리는 <깽개갱, 갠지갱> 등으로 구음하고 있으며 근래에는 이러한 구음대로 적어 악보를 꾸미고 있다.
육보는 한글로 된 것이 대부분이나 때로는 한자 육보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육보가 언제부터 쓰였는가 하는 점은 분명치 않으나 세조 이전부터 육보가 쓰여 왔고 악기마다 서로 다른 악보들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조선조 성종 때의 <악학궤범(樂學軌範)> 이후, 많은 거문고의 악보가 육보로 전해오는 것만 보아도 우리 음악의 역사나 변천과정을 연구하는 데 있어 이 육보의 해독은 절대적인 선행 작업이 아닐 수 없다. 한 마디로 육보를 모르고는 악곡을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