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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0. 최초로 연변을 찾은 전통음악집단

 

 

-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Ⅳ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행사가 연변예술대학에서 민족성악을 가르치고 있는 전화자 교수가 어렵게 한국으로 유학을 왔고, 그를 통하여 연변대학과 연결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1990년 한ㆍ중 수교가 이뤄지지 않았던 아주 어려운 여건에서 민족의 전통소리를 배우고자 한국《국립국악원》으로 유학을 온 전 교수를 만나게 된 배경을 잠시 이야기 하였다.

거문고의 명인 고 황득주로부터 전 교수를 소개받고 우리 3인은 반포 삼거리 식당에 가서 불고기와 냉면으로 늦은 저녁을 함께 했다. 맥주도 한잔 곁들였다. 그 당시의 우리와 중국의 화폐가치를 기억나게 하는 일이 하나 생각난다.

3인이 식사를 끝내고 75.000원을 계산 했는데, 전교수가 영수증을 자꾸 보여 달라는 것이었다. 무슨 영문인가 싶어 무심코 주었더니 그의 말이 “야, 내 3달 치 신봉을 한자리에서 먹어 치웠습네다”라고 놀래는 것이었다. 그 당시 고참 대학교수의 1개월 급여가 우리돈으로 25,000원이었음을 알게 하는 말이었다. 그러니 젊은 교수들은 2만원 미만이었을 것이고 대학 졸업 후, 운 좋게 전문 연주단체에 들어가 활동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월 1만원 안팎의 급여였다는 것이다.

1990년도 한국돈 1만원은 US달러로는 약 10$, 중국돈으로는 약 100위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우리돈 2만원으로 중국돈 100위안을 바꾸게 되었으니 중국의 경제가 크게 향상된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전화자 교수와 함께 식사를 하면서 연변에 전통음악을 공부하는 예술학교가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고, 전통의 민요며 판소리와 같은 성악도 지도하고 있고, 가야금이나 피리, 장쇄납(태평소), 젓대, 해금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 많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특히 말로만 들어 알던 안기옥의 제자 김진이란 가야금 교수가 있다는 점도 전해 들었다. 그리고 남한보다 연주자는 적지만 피리와 퉁소, 단소와 해금 등을 전업으로 연주하는 교수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족 예술단>이라는 연주단체가 있는데, 매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민족의 음악을 지켜가고 있다는 사실도 그를 통해 구체적으로 전해 듣게 되었다. 그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들으며 그 곳의 정경이 그대로 그려지는 것이었다.

넓은 땅 중국, 50여개 이상의 민족이 모여서 사는 넓은 땅에서 한국인으로 살아가며 한국인의 정신을 동포사회에 심고 있는 그들의 활동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정말 당장이라도 뛰어나 만나보고 싶도록 중국 동포 음악인들의 활동이나 생각이 그려지는 것이었다.

나의 질문이 계속되자 전화자 교수는 일차 연변을 방문해 보는 것이 어떤가를 제의해 오는 것이었다. 그렇다. 방문이 가능하다면 그 방법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와 황득주 명인은 의기 투합해서 연변땅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마음을 통했다. 그러려면 연변 예술대학의 초청장도 필요하고 동행할 연주자들도 모아야 했다.

전화자 교수는 연변 예술대학의 부학장으로 학교 내 외의 일을 주도하고 있던 정준갑 교수를 우리에게 소개해 주었다. 정 교수와 우리는 국제전화로 수없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우리의 방문의사를 확인한 후, 초청장을 보내 주었다. 1990년 7월 초, 봄에 시작된 우리의 대화는 그해 여름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동행할 연주자들을 모으고 비 수교국을 방문할 때에 받아야 하는 정부의 특별 교육을 받은 다음, 우리 20여명의 음악인들은 홍콩-북경을 경유하여 연변으로 들어가 연변예술학원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주요 참여자들은 피리의 서한범, 거문고의 황득주, 대금의 홍도후, 해금의 조주우, 김은이, 경기민요의 김금숙, 무용의 김영숙, 장고에 박화신, 가야금에 강영숙, 류지연, 등 여러 명이었고 그 외에 석정여고 장우현 교장 등 교육계 인사들도 참여하였던 것이다.  

홍콩에서 북경행 비행기를 갈아 탈 때부터 서서히 긴장감이 엄습해 오는 것이었다. 공산국가를 들어간다는 사실이 더욱 그랬다. 그러나 한편, 동포 음악인들을 만난다는 설레임 또한 묘한 흥분으로 일기 시작하는 것이다.

북경에 도착해서 연변행 비행기를 갈아타려 할 때, 연변대학에서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온 김문산 교수를 만났다. 서울에서 우리 일행이 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학교 측에서 우리의 안내를 위해 나왔다는 이야기를 듣고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지금은 미지의 땅이 되었으나 한때 고구려인들이 말을 달리던 옛 영토를 찾아 연변행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