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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

71. 목이 터져라 아리랑을 부르고 얼싸안고 춤을 추다

   

 

 

-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 Ⅴ

 

지난 주 속풀이에서는 【한중 전통음악 학술 및 실연교류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를 했다. 전화자 교수를 만나 연변예술대학이나 <조선족 예술단>, 연변의 음악인들에 관한 정보도 듣고 황득주 명인과 의기가 투합되어 연변땅을 직접 방문해 보기로 마음을 통하고 동행할 연주자들 20여명이 홍콩-북경을 경유하여 연변으로 들어가게 된 과정을 이야기 했다.

북경에서 연변행 작은 비행기에 올랐다. 약 2시간 후에 몹시 흔들리던 비행기는 드디어 우리를 연변 공항에 내려 주었다. 늦은 밤이었다. 마중 나온 정준갑 일행을 따라 백산 호텔에 짐을 풀었다. 말이 호텔이지 헌 수건 2장이 서로 모양이 다를 정도로 초라한 형태의 여관이었다.

아침에 일찍 찾아준 정준갑 교수를 따라 우리 일행은 예쁜 한복을 차려입고 미니버스에 올랐다. 학교에 도착하니 학원의 원로 교수들이 우리를 맞이하기 위해 건물 앞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한사람씩 내리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연변예술학원의 김삼진 원장, 무용, 미술, 서양음악과의 부원장, 민악과의 김진, 방용철, 이일남, 김석산, 신용춘, 김성삼 교수, 공산당 당서기 등이 우리를 극진히 환대해 주었다.  우리는 환담을 하면서 가지고 간 음반자료나 참고서적, 그리고 악보자료 등을 전해 주었고 단원들이 모은 2000$을 학교 당국에 성금으로 전달하였다. 이는 당시로는 매우 큰돈이어서 학교의 민족음악과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한 가지 새로운 사실은 한국의 전통음악인 20여명이 연변대학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대학 당국에서는 서둘러 <민족음악학과>, 줄여서는 <민악과>를 창설했다는 사실이다. 그 전에는 음악과 안에 전통성악 전공, 가야금 전공 등으로 분류해 오던 것을 독립 학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온다는 소식에 급히 서둘렀다는 말이 고맙게 들리는 것이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대학을 나온 젊은 연주자들의 한 달 급여가 1만원이 조금 넘을 정도, 미화 10$ 이었던 점을 감안해 보면 2000$의 위력은 짐작이 갈 것이다. 서로 인사가 끝난 다음 우리는 학교 수업현장을 둘러보았다. 건물은 낡았고 시설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교수나 학생들의 눈빛은 살아 움직이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어렵게 만나기는 하였으나 상호 음악교류회만은 이를 공개적으로 할 수 없는 미묘한 상황이었다. 호텔 주차장에도 평양 번호판을 붙인 차들이 주차되어 있었던 상황이어서 미수교국에서 간 음악인들에게 공개적인 음악회라는 것이 허용될 수 없다는 점은 후에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간에 공식적인 음악회의 형식이 아닌  ‘년환만회(聯歡晩會)’라는 이름으로 모 학교 강당에서 어렵게 어렵게 강의식으로 음악회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김진 교수가 근로복 같은 복장으로 가야금 산조를 연주하고, 그의 제자인 김성삼교수가 양복을 입고 장구반주를 하는 모습이며 이일남 교수의 해금연주, 북한식의 발성으로 노래하던 성악교수, 개량이 된 피리류의 장쇄납을 연주하던 교수, 대금을 개량한 저대의 연주, 양금의 연주, 전통 춤의 공연 등이 펼쳐졌다.

우리와 달리 연주 복색이 아닌 자유 복장으로 합주하던 모습 등등이 다소 생소하게 보였으나 진지한 그들의 연주는 감동적이었다. 우리일행도 한복과 연주복을 갖추어 입고 합주며 독주, 노래, 춤 등을 다양하게 선보였다. 특히 황득주 명인의 거문고 연주가 큰 인기를 끌었다. 경기민요도 그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보였다.

음악회를 끝낸 다음, 뒤풀이 장으로 옮겨 온 우리는 다과회를 가지며 서로의 연주에 깊은 격려를 나누었다. 그리고 함께 목이 터져라 아리랑을 불렀고 얼싸안고 춤을 추면서 밤이 깊도록 감회에 젖었던 것이다.

다음날, 우리일행과 학교의 교직원 전체는 함께 ‘들놀이’를 했다. 우리 일행을 위하여 각 종 음식을 장만해서 강변 자갈밭에 천막을 치고 함께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고 춤을 추며 시간을 같이 보냈던 것이다.  모두의 얼굴이 환하게 밝고 친근함이 마치 오래전부터 함께 지내온 형제처럼 정말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어제의 일처럼 기억이 생생하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9년, 필자는 그때의 뜨거웠던 만남을 못 잊어 학회를 조직하고 그러한 교류회를 다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올해 14회의 교류회를 끝냈으니 20회가 되고 30회가 되도록 이 모임은 줄기차게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우리가 동일민족이고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민족의 감정과 정신과 혼과 철학이 녹아있는 민족음악을 제대로 지켜가고, 또한 키워가는 것이 목적일진대 우리의 지속적인 만남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이 일에 모든 민족음악인들이 동참을 해야 마땅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 글을 읽어 준 독자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