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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 조선에 파견된 일본 건축가 5000평 대 저택을 짓다

 

“명치44년 2월(1911년) 조선은행 건축도 무사히 낙성식을 마쳐 나는 은행 측으로부터 5천 엔을 보너스로 받았다. 그 돈으로 경성 남대문 밖 봉래정 봉학산에 내 집을 지었다. 부지는 5,000평으로 남산이 바라다 보이고 한강물이 마치 정원수처럼 발아래 굽어보이는 명승지인데 내 나이 33살 때 일이다. 봄이면 산 정상에 올라 한강의 경치를 즐기는데 마치 극락에 이른 것 같았다.”

33살 청년의 나이에 부지 5천 평의 대저택을 지을 만큼 조선에 건너온 초보 건축가의 조선생활은 풍족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전인 1907년에 나카무라 요시헤이는 조선에 건너와 조선은행의 공사 감독을 맡았다. 한반도와 만주의 경제권을 쥐려는 포석으로 착수한  일본 제1은행 한국 총지점(조선은행 본점)이 조선에서의 첫 공사 감독이었다.

일본 하마마츠 출신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 1880.2.8-1963.12.21)는 일본의 건축가로 조선, 만주를 비롯하여 출신지인 시즈오카 현의 공공건물 건축에 많이 관여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는 공부가 죽기보다 싫어 아버지로부터 무척 꾸지람도 많이 들었던 그는 전기기사가 꿈이었으나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하여 훗날 조선은행의 설계를 맡게 되는 다츠야콘고(辰野金吾) 건축사무소에 입사함으로써 1907년 조선은행본점(현 화폐금융박물관) 건축현장의 공사 감독을 맡게 된 이래 만주, 대련 등에까지 진출하여 당시 공공기관의 건축물을 도맡아 짓게 된다.

그는 경성에서 건축사무소를 운영할 때 독일인 기사 등을 고용하게 되는 데 이때 성실한 독일인의 모습을 보고 반하여 독일의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계기로 독일을 포함한 유럽 여행을 1년간 하게 된다. 1921년 4월 일본을 출발한 나카무라는 맨 먼저 미국에 도착하여 승용차를 한 대 사서 시애틀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몰고 다닐 정도로 풍요로운 여행을 했다. 이어 런던, 프랑스, 노르웨이, 스페인, 독일 등 유럽여행을 1년간 하고 돌아와 건축사무소를 접고 대학에서 건축학을 가르치면서 말년에는 72살의 나이에 시즈오카현 교육위원으로 당선된다.

명치시대에 태어나 명치정부의 동아시아 침략의 발판으로 진출한 조선땅에 한 사람의 건축가로 부임하여 곳곳에 일본식 건축물을 남기고 간사람 나카무라 요시헤이. 그는 자서전에서 1909년 7월 조선은행 본점 정초식(定礎式)날 이토히로부미가 참석하여 <定礎>라는 두 글자를 쓴 것이 이토 공(公)의 생의 마지막 글씨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하마마츠시(濱松市) 자료실에서 제공한 나카무라의 13쪽짜리 자서전에는 그러나 그가 경성 봉래동 5천 평 대저택을 짓고 극락에 가까운 경치 속에 살았다는 것 외에는 단 1줄도 당시 조선인들이 나라 잃은 슬픔과 고뇌에 좌절하는 모습은 그려져 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