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쇠기마을에 있는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선생 무덤(왼쪽 박심문, 오른쪽 부인 청주한씨 무덤)
어제는 충정공 박심문 선생과 부인 청주 한 씨의 무덤이 있는 수억이 마을(일명 쇠기마을)을 다녀왔다. 길찾개(내비게이션)가 있다고는 하지만 무덤까지 길안내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서 원당역 언저리에서 헤매다가 쇠기마을의 약간 외딴 곳에 있는 청재공 재실을 겨우 찾아 무덤에까지 다녀 올 수 있었다.
세조 2년(1456)에 질정관(質正官)이 되어 소임을 마치고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의주(義州)의 용만(龍灣)에서 사육신(死六臣)의 처형소식을 들은 박심문 선생은 주변을 물리치고 심복(心腹) 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내가 육신(六臣)들과 더불어 죽기를 맹약한 일이 있었다. 이제 그들이 모두 참형되었는데 내 어찌 차마 혼자만 살 수 있으며 산다하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 가서 선대임금(세종과 문종)을 뵐 수 있겠는가? 내가 오늘 이미 죽기로 결심하였으니 육신(六臣)과 함께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봉서(封書) 에도 썼거니와 어린 임금(단종)께 받았던 예조정랑(禮曹正郎) 관직만 묘비에 쓰게 하라." 하고 준비한 독약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니 그의 나이 49살이었다.
충과 효는 둘이 아니라고 하듯 박심문 선생은 세종 5년(1424) 아버지가 안변(安邊) 임지에서 갑작스레 세상을 뜨자 16살의 어린나이에 혼자서 고향으로 운구하여 예법에 맞게 장례를 치러 칭송이 자자했다. 두 형은 일찍 죽어 편모슬하에서도 학문에 정진하여 약관의 나이에 대학자 반열에 오른 큰 인물이었다.
▲ 비문에서 바라본 재실 전경 |
선생은 세종 18년(1436) 친시문과((親試文科, 임금이 몸소 과장(科場)에 나와 시험 성적을 살피고 급제자를 정하던 문과시험)에 급제하여 기주관(記注官, 춘추관 벼슬아치)으로 있다가 함길도 절도사 김종서가 육진을 개척할 때 그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김종서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김종서는 매사를 선생과 의논하며 일을 처리 할 정도로 두 사람의 신뢰 관계는 깊었는데 단종 1년(1453)에 계유정란으로 김종서가 살해되자 비분강개하여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집 근처에 두견화를 심어 울분을 달랬다.
이때 사육신인 성삼문 박팽년 등이 선생의 집에 드나들며 단종복위를 꾀하다가 세조 2년 (1456)에 중국 사신인 질정관(質正官)으로 차출 되어 여러 번 사양하다 떠나는 바람에 단종복위에 합류하지 못하게 된다.
선생의 음독자결 소식은 3일 뒤 한양에 있는 부인과 가족들에게 알려졌는데 선생의 부음을 받은 3일 뒤에 부인인 청주 한 씨 역시 46살의 나이로 목숨을 끊었다. 선생의 유해는 의주로부터 선산이 있는 고양 원당리 포도골로 옮겨져 장사지냈다.
▲ 충정공 청재(淸齋) 박심문(朴審問) 선생 신도비
그러나 당시 조정은 세조가 집권하고 있었고 세조는 행여나 있을 단종복위 조짐에 날카롭게 신경을 곤두세우던 때라 박심문 선생의 자결을 병사(病死)로 숨긴 채 가족들에게 조차도 쉬쉬하고 지내야 했다. 그렇게 300여년이란 세월이 무심하게 흘렀다.
야속한 시간이 흐르고 박심문의 이름 석 자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단종의 매형인 헌민공의 꼼꼼한 기록에 의해서였다. 이 기록이 밝혀지자 순조임금은 4칠신 (死七臣)이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선생에게 ‘가선대부이조참판’을 추서했다. 그리고 1828년 영월 창절사(彰節祠)에 배향되었으며 1871년에는 고종 황제가 충정공(忠貞公) 시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이후 공주 숙모전, 진안 이산묘, 대전 숭절사, 진주 충정사, 해남 죽음사(竹陰祠), 장흥 세덕사, 영주 영모정 등 전국적으로 14군데의 사당에서 충정공 박심문 선생을 기리고 있는 것만 봐도 선생의 충절을 가늠 할 수 있을 것이다.
출장 간 남편이 중국 땅을 떠나 한양으로 들어오기도 전에 사육신의 참형 소식을 접하고 그길로 자결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던 부인과 가족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더구나 부인은 남편의 부음을 듣고 3일 만에 자결하였으니 가문의 슬픔과 한은 몇 배 더 컸을 것이다.
▲ 박심문 선생 사당 관련 사진들
박심문 선생과 부인 청주 한 씨 무덤은 쇠기골 안쪽 소나무 우거진 숲속에 봉분을 나란히 하고 있다. 비운의 왕 단종과 그를 둘러싼 충신들의 죽음 가운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 박심문 선생이 있었음을 기억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에서 내려오는데 마침 재실 앞마당에 나와 있던 19대 후손인 박명배 어르신께서 반갑게 인사를 건넨다.
“어디서 듣고 이곳을 찾았느냐?”면서 박심문 선생에 대한 관심이 있다는 글쓴이에게 이런저런 조상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충정공 박심문 선생에 관한 작은 책자를 쥐어준다. 몸이 불편한 듯 보였지만 자랑스러운 선조를 이야기 할 때 빛나던 눈동자는 박심문 선생의 피를 영락없이 받은 것 같아 고개가 절로 깊이 숙여졌다.
왕실의 맏 아드님 / 어린나이에 보위 올라 / 때마침 비운 만나 / 두메산골 내 치었소 / 한 조각 푸른 뫼에 / 만고 원혼 슬프외다 / 임이시여 강림하와 / 이 술잔을 드옵소서 -밀약박 씨 <종보 ‘宗報, 24호, 2012>, 박충원 제문-
*재실과 무덤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성사동 산 31번지 (쇠기마을)
밀양박씨청재공파대종회
▲ 재실을 지키는 19대 후손 박명배 선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