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 = 이윤옥 기자]
벽장 속에서 태극기 만든 통영의 “김응수”
이윤옥
벽장 문 걸어 닫고
호롱불 밝혀 만든 태극기
이로써 빼앗긴 조국을 찾을 수만 있다면
밤샌들 못 새우며 목숨인들 아까우랴
열여덟 꽃다운 처녀
숨죽여 만든 국기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목청껏 부른 대한독립만세 함성
죄목은 보안법 위반이요
죄질은 악질이라
차디찬 감옥소 시멘트 날바닥에
옷 벗기고 콩밥으로 주린 배 쥐게 해도
단한 번 꺾이지 않던 그 당당함
그대는 정녕
일신의 딸, 조선 독립의 화신이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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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응수 애국지사(왼쪽)와 1919년 무렵 여학생들이 태극기를 수놓은 밥상보 |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한 더 많은 이야기는 <서간도에 들꽃 피다> 1,2,3권에 있습니다.
김응수(金應守, 1901. 1.21 ~ 1979. 8.18)
통영에서 태어나 부산 일신여학교(현, 동래여자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 중이던 김응수 애국지사는 1919년 3월 11일 일어난 만세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그의 나이 열여덟 살 때의 일이다. 당시 이들의 만세운동을 기록한 일본 쪽 자료의 따르면 “부산진 소재 기독교 경영 일신여학교 한국인 여교사 임말이 외 학생 1명을 취조한바 이 학교 교장인 캐나다인 여 선교사 데이비드 및 한국인 여교사 주경애가 주동이 되어 교원들에게 ‘각지에 독립운동이 시작되고 있으니 우리 학교도 거사하자’고 협의를 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학생들에게 전달하여 3월 10일 고등과 학생 11명이 기숙사 안에서 태극기 50개를 제작하여 이를 기숙사 사감 메제스에게 넘겼으며 깃대 31개를 발견하였을 뿐 아니라 태극기를 제작할 때 사용한 붓 따위도 압수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당시 일신여학교의 만세운동 준비 상황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웃지 못 할 이야기가 하나 있어 소개하면 임말이와 임망이 자매 이야기다. ≪동래학원100년사≫를 통해 좀 더 살펴보면 당시 교사 임말이(6회 졸업)와 동생 임망이 자매는 형부인 사카이형사에게 일신여학교의 만세운동 전모를 제보 해버렸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운동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된 왜경은 만세운동에 가담한 11명의 학생들을 모두 잡아갈 수 있게 되었으나 이들을 제보한 임말이, 임망이 자매는 형부 사카이의 도움으로 풀려나와 태연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학생들은 10일간 동맹휴학을 통해 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내었다고 한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소식이 부산에 전해진 것은 거사 다음날인 3월 2일로 이 때 기독교 인사들에 의해 독립선언서가 비밀리에 배포되었다. 이에 따라 부산 내 각 급 학교에서는 만세시위를 준비해 나갔는데, 김응수 애국지사(8회 졸업)는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박시연(朴時淵)을 비롯한 김반수(7회 졸업), 심순의(7회 졸업), 송명진(10회 졸업), 김순복 (9회 졸업), 송명진 (10회 졸업), 김순이, 박정수, 김봉애, 김복선, 이명시 등 일신여학교 기숙사 학우 10여 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추진하였다.
이들은 부산상업학교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3월 11일 밤을 기해 거사하기로 뜻을 모으고, 3월 10일 저녁에 기숙사 벽장 속에 숨어서 밤을 새워 태극기 50여 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거사당일인 3월 11일에는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온 뒤 밤 9시를 기해 교사 주경애·박시연 등과 함께 미리 준비한 태극기를 손에 들고 독립만세를 외친 뒤 시내로 나아가 좌천동(佐川洞)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때 그는 시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면서 시위행렬의 선봉에 섰다가 이를 탄압하는 왜경에 잡혔다.
김응수 애국지사는 왜경으로부터 뺨을 맞고 구두 발로 차이는 등 모진 수모를 당하면서도 "세살 먹은 아이도 제 밥을 빼앗으면 달라고 운다. 우리들이 우리나라를 돌려 달라고 운동하는데 무엇이 나쁘냐?"면서 당당하게 독립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는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 이 일로 1919년 3월 12일 잡혀가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5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