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신불출과 함께 종로의 제일극장에서 배뱅이굿으로 공전의 히트를 친 이은관은 전라도에서 함경도까지 전국을 돌며 순회공연을 하였다. 당시 신불출은 유명세를 타던 인물이어서 관공서에서도 그를 귀빈으로 접대할 정도였다는 이야기, 조국의 해방과 더불어 대한국악원의 회원이 되어 활동하다가 6,25 때에는 군인들을 위한 위로의 공연을 장소팔, 고춘자 등과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또 이은관은 60년대 고려영화사에서 기획한 배뱅이굿이라는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레코드판이 동시에 잘 나가는 바람에 그의 이름이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는 이야기, 또한 국악인으로는 드물게 �스폰이나 아코디언과 같은 악기도 잘 다루었는데, 이러한 결과는 그 스스로 악보를 읽을 수 있었기 에 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사실은 또한 그의 음악적 욕구나 역량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라는 이야기 등을 진행하였다.
38선이 가로 막히지 않았을 당시에는 서도소리와 배뱅이굿을 황해도 황주에 가서 이인수 선생께 배울 수 있었고, 선생의 추천으로 황해도 장연 권번에서 기생들을 가르치면서도 프로로 살기 위해 수시로 배웠는데, 그렇다면 경기의 소리들은 어떻게 익혔을까?
서울에 와서는 최경식 선생에게 배웠다. 최경식은 벽파 이창배를 비롯하여 수많은 경기명창들을 배출해 낸 대 명창이었다. 이은관은 전통사회에서 소리를 부르며 살아온 소리꾼들 중에서 서양의 5선 악보를 읽고 부를 수 있는 능력있는 소리꾼으로 알려져 있는데, 소리꾼으로써 독보가 자유자재로웠던 사람은 매우 드문 사례인 것이다. 그가 5선보를 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나 계기를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어 오래도록 기억에 남고 있다.
“내가 언제 5선 악보를 처음 배웠냐면 625 전쟁 때였어요. 전쟁 때라고 하니 좀 특이하죠. 6.25 전쟁은 남침이었으니 저들이 이북서 넘어오지 않았습니까? 그때 나는 피난을 못 갔습니다. 이북 사람들이 넘어와서 여기 사람들을 포섭하여 연예단을 만들었단 말입니다. 예술단이 아니고, 위문대와 같은 단체를 만들어 연예단이라고 했는데 좀 차원이 얕은 거죠.
그런데 이 단체에 일류들을 다 뽑았지요. 그쪽에서 넘어온 사람하고 짬뽕을 해가지고 하니까 아무리 반공사상이 있어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하니까 참여해야 해요. 까딱하면 죽는데, 여기에 유명한 사람들 많이 뽑혀갔습니다. 이름은 안댑니다만, 그때 대한국악원에서도 잘하는 사람 10여명이 뽑혀 갔습니다. 저도 갔고, 가요 계통의 사람들도, 그리고 클래식 하는 대학가의 유명한 사람들도 뽑아갔습니다. 군가 있지 않습니까? 예를 들면‘높이 들어라 붉은 기’와 같은 노래들을 우리에게 심어 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걸 가르치죠.
악보를 복사해 가지고 와서 연예인들 50명이고 100명이고 있을 적에 여기 이것을 지도할 사람 있으면 나오라는 겁니다. 한 여자가 딱 나가는 겁니다.“제가 하죠.”그러더니 뒤로 돌아서 살짝 몇 번 흥얼거리더니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금방 부르는데, 기가 막히더라구요. 나는 놀랬습니다. 야, 저걸 내가 알면 좋겠다. 그때 내가 결심을 한 거죠. 저걸 배워야겠다, 악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때부터 배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꽤 오래됐죠.”
이 대목에서 누구한테 어떤 방법으로 배웠는가 하는 점이 궁굼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구에게 배웠는가를 묻는 질문에 “혼자 배웠지요. 물론 지도하는 사람도 있죠. 이병우 선생에게도 배웠고, 그 후에는 형석희씨라고 가요계에서 작곡 많이 한 분이죠. 옛 사람들은 다 압니다. 해방 후에도 일제 때 작곡한 <맹꽁이 타령> 같은 곡을 리바이벌 했습니다. 관심을 두고 있고 그 분들하고 내가 연예단으로 다니니까 자연스럽게 배우게 됩니다. 또한 연예단에 성악도 하고 피아노도 쳤던 여학생들도 있어서 악보를 익힐 기회가 있었습니다. 배우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