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경제/얼레빗=서한범 명예교수] 이은관이 누구보다 악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배경은 특히 서도소리의 장단이 불규칙적이어서 지도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어렵다는 점이고, 그 다음은 같은 노래라도 잔가락이나 시김새의 처리가 달라 함께 부르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시김새란 식음(飾音)새, 즉 음을 꾸미는 모양으로 김치에 비한다면 양념과 같은 역할로 지역이나 지방에 따라 김치맛이 다른 것처럼, 음악에 있어서도 지방에 따라 독특한 맛이나 분위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이은관은 서도소리의 악보화 문제, 기보의 체계화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지난 주 이 난에서 하였다. 또한 이은관은 해마다 제자들에게 가르친 내용을 반드시 공개적으로 발표하는 것을 의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 까닭은 제자를 지도해야 본인도 공부를 할 수 있고, 아는 것도 자꾸 복습을 해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찍 이름이 알려진 젊은 소리꾼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은관은 제자를 가르쳐 3년이면 이수 시험을 치룰 자격을 주는 현 무형문화재 이수자 제도에 못 마땅한 심기를 들어내기도 하였다. 3년으로는 어림도 없다는 말이다. 그는 최소한 10년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만큼 어려운 길이 바로 소리의 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소리의 조건은 목소리도 좋아야 하지만, 보다 인간성이 갖추어 져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 왔던 것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말대로 배뱅이굿에 이은관을 뛰어넘는 제자가 나와야 하는데, 아니 그것은 차치하고 이은관 정도만 하는 제자라도 나와야 배뱅이굿을 좋아하는 애호가들이 등을 돌리지 않을 것인데, 이것이 큰 문제라면 문제가 될 것이다. 생전의 이은관은 박준영이나 김경배, 박정욱, 이성관, 여성으로는 박성현과 전옥희 등을 제자로 키워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배우러 몰려들고 있으며 곧잘 하는 학생들이 꽤 있어서 배뱅이굿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자랑하며 만면에 웃음을 담아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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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소리 배뱅이굿의 예능보유자가 된 이후에는 후진들을 키우는 전수교육에 몰두하는가 하면 신민요를 작사하고 작곡하며 특히 창작 소리극을 제작하고 공연하는 활동 등을 쉼 없이 실시해 온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활동들을 통해 서도소리를 알려왔고 특히 그의 주전공 분야인 배뱅이굿을 알리며 소리로 국위를 선양해 온 분이었다.
이은관, 김정연, 오복녀와 같은 명창들이 서도소리의 보존과 보급을 위해 고군분투한 결과, 이제 서도소리는 경기소리의 한 변방이 아니라, 독립된 장르로 당당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중이다. 이은관의 스승 김인수를 포함하여 서도소리 속에도 남도소리를 넣는 분들이 있었는데, 선생님에게 죄스럽지만 아무래도 서도소리는 서도소리 창법으로 불러야 한다고 믿고 있었기에 배뱅이굿에 들어있는 대부분의 남도소리들은 서도소리제로 고치고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쳐 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이 바람에 한때 이은관은 선생의 가락을 그대로 하지 않는다고 하여 문화재의 인정을 미루었다는 말도 들렸다. 그러나 누가 무어라 해도 그는 평생을 배뱅이굿을 좋아했고, 즐겨 불렀으며 배뱅이굿과 함께 살다 간 이시대의 진정한 소리꾼이었다.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어요. 부모님께서 선천적으로 목소리를 주셨고, 제자신이 소리가 좋아 해 왔지요. 간혹 관중의 호응이 없을 때에도 내가 못해 그러려니 생각하고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지 후회를 한 적은 없습니다.”
정부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로 <서도소리>를 지정하고 전승체계를 마련했다고는 하나, 아직도 전문가의 육성이나 이를 즐기려는 애호가의 층은 엷기만 한 상황에서 그동안 이은관 선생의 건재는 국악계나 서도소리계의 후진들에게 커다란 버팀목이었던 점을 부정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