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이윤옥 기자] 유동하 선생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소식이 보도되자 국민회 원동위원들과 대동공보사 관련 인물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계획을 논의하였고 이 과정에서 선생은 부친의 명을 받들어 안중근과 우덕순을 하얼빈역까지 무사히 동행하고 연락을 담당하여 의거를 성공할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이 일로 투옥되어 1년 6개월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이후 러시아로 복귀하여 러시아 한인사회의 민족운동을 고취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의거로 체포된 유동하와 우덕순, 조도선 등은 심문과 재판과정 내내 관련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 진술과 위증으로 일관하였으며 안중근 의사는 시종일관 자신의 단독 결행임을 주장하였고 그 외의 관련자들도 사전에 약속한 내용만을 진술하였다.
1909년 10월에 들어서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장관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만주 하얼빈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국 침략의 원흉인 이토를 처단할 것을 논의한 결과 명사수인 안중근 의사가 추천되었으며, 유동하의 부친인 유경집과 우덕순,조도선,김성화,탁공규 등이 구국혁신을 맹서하고 연서한 뒤“7인 동맹”을 조직하였다. 이 동맹은 의거를 구체적으로 계획하기 위해 출범한 결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토가 하얼빈에 도착하는 날, 거리에서 입수한 신문에 “이토 히로부미가 25일 장춘역을 출발하여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브체프를 만나려고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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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먼저 하얼빈 역 주변을 미리 답사하면서 치밀하게 의거계획을 수립하였고, 거사 당일인 10월 26일 오전 7시 경에 하얼빈 역으로 나와 경비가 있었으나 일본인 환영객 사이에 끼어서 역 구내로 들어가는데 성공하였다. 상오 9시경 이토가 탄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안중근 의사의 3발의 탄환을 맞고 이토 히로부미가 쓰러졌으며 이토는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약 30분 후에 69세를 일기로 절명하였다. 안중근의사의 의거가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의거 후 유동하 선생도 러시아 헌병에 체포되었고, 재판과정에서 모든 사실을 부인하였으나 안중근 의사에게 이토 히로부미의 도착일시를 전보로 타전해 살인을 방조한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후 1911년 8월 22일 상오 9시에 여순감옥에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선생은 부친과 함께 약국을 경영하며 농사도 짓고 초등학교를 설립해 교육에 종사하였다. 1917년 봄, 부친과 함께 남러시아의 싸말리아로 들어갔으며, 10월의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시베리아에까지 볼세비키혁명의 여파가 미치면서 선생도 볼세비키 사상을 받아들이고 사회주의자가 되어 혁명군에 가담하여 활동 하던 중, 1918년 가을, 시베리아에 주둔한 일본군에 의해 11명의 애국청년들과 함께 체포되어 싸말리야 강가로 끌려가서 교두에서 총살을 당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으며 국가보훈처는 유동하 선생을 2008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하였다.
<자료: 국가보훈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