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일제강점기 애국가 사건은 주로 학생들과 관련한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학생들이 애국가 자료를 가지고 있다가 검거된 경우나 교사가 애국가를 학생들에게 가르쳤다는 사실이 들켜 사건이 된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신문과 총독부 조사보고서류에 기록된 애국가 사건들이다. 하동 보통학교 애국가사건 1923년 10월 2일자 「조선일보」에는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준 이두석(李斗錫)이란 인물이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이두석이 하동군 량보면 여의리 주재소에 근무하는 홍판일(黃判日)이란 주재소원에게 애국가가 적힌 공책을 빌려 주었는데, 그것이 다른 주재소원의 눈에 띄어 사건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사만으로는 위의 보도 이후 어떻게 처리되었는지 확인할 수 없지만 이런 사건은 지방 곳곳에서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학습장조차도 철저하게 검색했던 실상을 보여준 것이다. 실제 필자 소장 자료 중 「공민학교 교장 시험 문제집」제1종․2종이란 공책에 애국가 1절이 연필과 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당시 이런 노래는 인쇄 될 수 없었음으로 이같이 잡기장 속에 기록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일제는 애국가와 태극기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3.1운동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모든 항일시위에서 태극기를 게양하고, 애국가를 불렀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총독부는 애국가류에 대한 단속을 강화했다. 바로 1910년 10월 내무부 학무국 명의로 축제일 약해를 만들어 태극기나 애국가에 대한 검속을 강조했던 것이다. ▲ 2011년 문화재청 등록문화재 제475호. 애국창가. 이 책에는 무궁화가애국가 등 70여 편의 애국창가가 수록되었다. 사립학교 중에서는 창가나 그 외의 다른 것으로 독립을 고취하며 일본으로의 반항을 장려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사용을 허락지 않았으므로 취체(取締)상 가장 주의를 요한다.또한 총독부는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모든 교육과정에 학습케 했고, 일장기 게양을 의무화 했다. 이와 함께 황국신민의 서사를 아침마다 제창케 하고 애국일(愛國日)의 노래(일본군에 감사하는 황국신민이 되자는 내용을 담은 노래) 부르기와 궁성요배(일왕의 황궁을 향해 절 하는 것), 정오의 묵도(일본군의 무운을 비는 묵념), 신사참배, 가미다나(집안에 놓는 신을 모시는 신단)의 설치, 일어상용, 시국 좌담회 개최 등을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만세운동이란 나라를 오래도록 유지시켜 달라는 기원을 구호로 하여 저항의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31운동에서의 만세는 조국이여 만년동안 계속 될 지어다라는 뜻이다. 이때의 운동이 위와 같이 저항의 한 수단인〈만세운동〉이었음은 민중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조선인이 모두 현실의 학정에 비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구한국 정부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독립 만세를 부르는 것이니 우리 다 같이 끝까지 독립만세 시위를 그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여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경성 시내가 만세 소리에 떴다 잠겼다고 할 정도였다. 실제 시위에 대한 스스로의 명칭에서도 만세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시위를 용천리 시위에서 희생자가 많이 난 것에 대해 현북면민이 위로하기 위하여 용천리로 가서 만세운동을 벌였는데 이를 위로 만세라 했던 것이다. 또한 이때 만세 운동을 위해 집결한 하조대 뒷편의 고개를 만세고개라고 부르는 데서 알 수 있다. 또한 굳이 군수나 면장이나 구장(리장)등의 관공리를 앞장 세워 만세를 부르게 한 것도 이와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1895년 청일전쟁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입지가 강화된 일본은 1898년 시베리아 철도 부설과 부동항 확보를 최우선으로 삼은 러시아와 조선을 사이에 두고 충돌했다. 이러한 상황에 주눅이 든 고종은 급기야 1882년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옮겨 위기를 모면하려 했다. 미국의 지원으로 러시아에 망명정부를 세우고 싶다.며 조미수호조약대로 조선을 도와줄 것을 미국에 기대하는 나약함의 소유자였으니 그럴 만도 하였다. ▲ 독립신문 폐간 까지의 로고 , 글판과 영문화 이러한 상황을 국가의 위기로 인식한 일부 지식인들, 이를 테면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은 국권수호와 자주독립을 위하여 국민을 계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곧 계몽을 목적으로 한 신문의 창간으로 바로 독립신문이다. 이 신문의 독립 용어 사용은 1894년 음력 12월 12일 고종이 종묘에 올리는 고유문(告由文)에서 처음 쓴 것을 시작으로 세 번째 사용으로독립신문은 제호에 태극무늬까지 넣어 시대정신인 독립을 사시(社是)로 제시하였다. 이 신문의 독립은 국가 구성원 모두가 새로운 문명에 눈을 떠 인권을 존중하고, 국민 각자가 직분을 다하여 나라의 부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애국가 역사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문헌을 꼽는다면 1965년 발행된 《배재팔십년사》(培栽八十年史)이다. 이 책은 아펜젤라(appenzeller)목사가 설립한 신학문 발상지 배재학당 역사를 기록한 책으로 여기에 애국가에 대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정초식 기념식장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독립가진보가를 불렀는데, 이중 조선가가 애국가라며 윤치호가 작사하였고 곡조는 벙커(D.H. Bunker) 교사가 편곡한 것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이는 10년 전인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애국가작사자조사위원회를 구성하여 6개월간의 조사 끝에 윤치호 작사 확정 유보로 결론을 내린 이후 기록이기에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작사자 문제를 미결로 남긴 이후, 윤치호를 작사자로 주장하는 편과 안창호가 작사자로 보는편으로 갈라져 최근까지도 논쟁이 이어졌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랜 논쟁의 주제가 바로 이 애국가 작사자 문제인데, 지난 해 까지도 국가싱징연구회 회원과 흥사단 간에 격한 논쟁이 있었다. 그래서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로 주장하는 편에서 이 책은 20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국가(國歌/National Anthem)는 국호 대한민국국기 태극기․국화 무궁화와 함께 노래로서 나라를 표상하는 국가 상징물의 하나이다. 추상적인 대한민국을 구체적으로 역사성과 이념을 가사와 선율로 나타낸 것이다. 이로서 국가는 부르는 이에게 민족 정서를 통해 이념을 일체화 시켜 연대감과 동질감을 갖게 하는 것을 첫 째의 기능으로 삼는다. 이런 점에서 기능음악이거나 정치음악이지 감상을 위한 절대음악은 아닌 것이다. 대한민국의 국가는 애국가(愛國歌)다. 이 애국가는 국가 고유 곡명이면서 동시에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가로서의 명칭이기도 하다. 다시 말하면 기능상으로는 나라의 유일한 제도적 노래인 국가이면서 나라를 사랑하자는 계몽적 노래(Patriotic Hymn)의 하나인 애국가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National Anthem인 동시에 Patriotic Hymn이고, 명칭은 Ae-kuk-ga인 것이다. 이는 다른 나라 국가와의 차이이기도 한데, 그러므로 정확한 표기는 대한민국 국가 애국가라고 하고, 식순에서도 국가 제창이라고 해야 옳다. 우리가 태극기에 대한 경례라고 하지 않고 국기
[한국문화신문 = 김연갑 국가상장연구회 위원] 한 정치인의 애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따진다면 아리랑이 국가다라는 발언이 애국가담론의 주제가 되었음이 현실이다. 이는 헌법에 국호(대한민국), 국기(태극기)는 규정하고 있으나 국가(애국가)에 대해서는 규정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60년대 이후 많은 논란(작사자 논란, 가사 개정 논란, 작곡 표절시비, 국가제정 논의 등)이 있어왔기 때문인 듯하다. 이에 한국문화신문에서는 근대사 자료수집가로 애국가 관련 논문을 발표하고, 작사자 논쟁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국가상장연구회 김연갑 위원로부터 애국가 논란의 배경과 진행과정을 자료 중심으로 풀어가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특히 독자여러분의 이의 제기나 사료비판을 적극 수용하여 애국가 역사 정리에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편집자말) 1981년, 나는 아리랑을 민족의 노래로 인식하고 가슴에 담아 오다 또 하나의 중요한 주제 역사의 노래 애국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연신내 골목 헌책방에서 산 장준하의 《돌베게》라는 책이다. 일제 학병으로 갔다가 부대를 탈출하여 중국군 준위로 입대하고, 다시 광복군에 참여하다 해방을 맞아 조국으로 환국하는 과정을 한숨과 격정으로 단숨에 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