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신임 독립기념관장에 광복회가 '뉴라이트'라고 지목했던 재단법인 대한민국역사와미래 김형석 이사장이 임명됐다. 국가보훈부는 김 이사장이 임기 3년의 독립기념관장직에 6일 임명됐다고 밝힌 것이다. 이에 이종찬 광복회장은 "용산 대통령실에 일제 밀정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5일 기자회견에서 “독립기념관장 지원자들에 대해 서류전형과 면접을 한 독립기념관 임원추천위원회(아래 임추위)가 상징성 있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을 후보에서 탈락시켰다.”라면서 임추위의 후보자 추천 결정에 대해 위원회 회의록에 서명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항의했다고 한다. 임추위가 탈락시킨 독립운동가 후손 2명은 결과에 불복해 위원회 결정의 무효확인 소송 및 집행정지 신청을 서울행정법원에 제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 회장은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할 수 있는 신성한 독립기념관이 ‘합법을 가장한 불법’으로 뉴라이트 세력에 유린당하고 있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다”라며 후보자 추천 결정의 전면 무효화와 원점 재논의를 보훈부에 촉구했다고 한다. 국가보훈부는 “뉴라이트 인사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하지만 경향신문 사설에는 “김 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24절기의 열셋째 입추(立秋)입니다.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합니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조선시대에는 이때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비를 멈추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은 성안으로 통하는 물길을 막고, 성안의 모든 샘물을 덮습니다. 그리고 모든 성안 사람은 물을 써서는 안 되며, 소변을 보아서도 안 된다고 했지요. 그뿐만이 아니라 비를 섭섭하게 하는 모든 행위는 금지됩니다. 심지어 성교까지도 비를 섭섭하게 한다 해서 기청제 지내는 전날 밤에는 부부가 각방을 써야 했습니다. 그리고 양방(陽方)인 남문(南門)을 열고 음방(陰方)인 북문은 닫으며, 이날 음(陰)인 부녀자의 시장 나들이는 절대 금합니다. 제사를 지내는 곳에는 양색(陽色)인 붉은 깃발을 휘날리고 제주(祭主)도 붉은 옷차림이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며, 입추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란 뜻의 잔서(殘暑)라고 하지만, 말복이 남아 있어 불볕더위는 아직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하루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 아비는 한 가닥 충성심으로 오직 나라를 위해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만 알고 이조원(李肇源)의 역적 행위를 힘써 성토하다가, 도리어 모함을 받아 비참하게 끔찍한 화를 입고 마침내 섬 속의 원혼(冤魂)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자식이 된 자가 한 가닥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는 서둘러 원통함을 호소하는 것은 본디 당면한 것으로서, 단지 듣기를, 대궐의 뜰에 북을 설치한 것은 신하가 원통한 바를 하소연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길이라고 하기에, 장사를 치르자마자 예절은 돌아보지 않은 채, 서리의 옷으로 바꾸어 입고 돈화문의 서협문(西挾門)으로 들어가, 곧바로 북이 설치된 곳에 가서 북을 안고 눈물을 흘리며 북을 쳤습니다.“ 이는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8월 4일 기록으로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서유규를 귀양보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려고 대궐의 북을 친 것인데 억울함을 살피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마구 궐문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 귀양 보내고 이를 왕조실록에 장황하게 기록하여 둔 것은 뭔가 임금이나 벼슬아치들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규정에 너무 치우친다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물가의 정자[水閣] - 임황(任璜) “수풀 사이 샘에서 발을 씻고서 (濯足林泉間) 흰 바위 위에 편하게 누웠네 (悠然臥白石) 새소리에 문득 꿈을 깨고 보니 (夢驚幽鳥聲) 저무는 앞산 가랑비에 젖고 있네 (細雨前山夕)“ 지난 7월 무덥다는 절기 소서와 대서, 그리고 잡절인 초복과 중복을 지냈다. 어제 8월 2일 아침 10시에는 날씨정보를 제공하는 케이웨더(주)가 일부를 뺀 온 나라 대부분에 ‘폭염특보’를 내렸다. 기상청이 제공한 폭염특보 발효 지도를 보면 온 나라 대부분이 온통 보라색으로 칠해져 있다. 하루 가운데 가장 높은 체감온도가 35℃ 이상이 2일 이상 지속될 것으로 예상될 때 내린다는 ‘폭염특보’, 그만큼 우리는 불볕더위에 몸살을 앓는다. 그러나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없던 조선시대, 옷을 훌훌 벗어버릴 수도 없던 선비들은 어떻게 여름을 났을까? 그들은 솔바람 소리를 들으며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것을 더위를 물리치는 으뜸 방법으로 여겼다. 거기서 조금 나가면 물가에서 발을 씻고(탁족) 널따란 바위에 누워 잠이 드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9세기 동산양개 선사는 ”더위를 피하려면 너 자신이 더위가 되어라.”라고 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무식한 무리들이 요사스러운 말에 혹하여, 질병이나 초상이 있으면 즉시 야제(野祭, 길가나 들에서 지내는 제사)를 행하며, 이것이 아니면 이 빌미[祟, 재앙이나 병 따위 불행이 생기는 원인]를 풀어낼 수 없다고 하여, 남녀가 떼를 지어 무당을 불러 모으고 술과 고기를 성대하게 차리며, 또는 중의 무리를 끌어오고 불상(佛像)을 맞아들여, 향화(香花)와 다식(茶食)을 앞에 벌려 놓고는 노래와 춤과 범패(梵唄)가 서로 섞이어 울려서, 음란하고 요사스러우며 난잡하여 예절을 무너뜨리고 풍속을 상하는 일이 이보다 심함이 없사오니, 수령들이 엄하게 금하고 다스리되, 만일 범하는 자가 있으면 관리와 이(里)의 정장(正長)ㆍ색장(色掌) 등을 함께 그 죄를 다스리게 하옵소서.“ 위는 《세종실록》 53권, 세종 13년(1431년) 8월 2일 기록으로 사헌부가 백성들이 길에서 제사를 지내는 것과 무당이 하는 굿 그리고 불공을 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임금께 아뢰는 내용입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가 성했지만,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나라의 근본이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기 시작했으며, 그 바람에 큰 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그뿐만이 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는 신도 또한 한 번 가서 보았는데, 그 둑을 쌓은 곳이 길이가 7천1백 96척(1척≒ 30.3cm, 약 2.18km)이고 넓이가 50척(약 15m)이며, 수문이 네 군데인데, 가운데 세 곳은 모두 돌기둥을 세웠고 둑 위의 저수한 곳이 거의 일식(一息, 30리로 약 11.79km)이나 되고, 뚝 아래의 묵은 땅이 광활하기가 제(堤, 방둑)의 3배나 됩니다. 지금 농사일이 한창이어서 두루 볼 수 없으니, 농한기를 기다렸다가 상하의 형세를 살펴 다시 아뢰겠습니다.” 위는 《태종실록》 30권, 태종 15년(1415년) 8월 1일 치 기록으로 전라도 관찰사 박습이 김제(金堤)의 ‘벽골제(碧骨堤)’에 관해 아뢰는 내용으로 이에 태종은 장흥(長興)ㆍ고흥(高興)ㆍ광양(光陽)의 세 성을 쌓는 것은 멈추고 먼저 벽골제(碧骨堤)를 쌓으라고 합니다. 문화유산청에서 사적으로 지정한 김제 벽골제는 백제 비류왕 27년(330년) 김제평야에 벼농사를 짓기 위하여 인공적으로 제방을 쌓아서 생긴 둑이라고 하지요. 제방을 쌓아 제방 위는 거대한 저수지가 되고, 제방 아래는 거대한 농토가 되게 하여 김제평야는 벼농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9년 전인 1905년 7월 29일 미국과 일본은 저 악명높은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정”을 맺습니다. 일본의 내각총리대신 가쓰라 다로와 미국의 전쟁부 장관 윌리엄 태프트 사이에 오간 식민지 경영 밀약입니다. 미국은 일본에게 러시아를 견제해달라고 하면서 대신 조선 침략을 인정하고 일본은 미국의 대중국 전략의 다리인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를 인정하면서 아시아 패권구도를 정리한 것입니다. 이 결과, 조선은 미국의 도움에 따라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이 가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미국과 일본은 채 1년도 안 되는 기간에 걸쳐 모두 네 차례의 협정을 맺어 일본의 한국 지배를 몇 번씩 재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이렇게 밀약을 맺은 태프트(William Howard Taft, 1857~1930)는 훗날 27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가쓰라 다로(かつらたろう[桂 太郎] 1847~1913)는 을사늑약과 한일강제병합시기에 이르기까지 총리대신을 지냈으니 미-일의 동아시아 제국주의 동맹체제 역사는 오래 지속된 것입니다. 이후 아시아-태평양 전쟁 종전이 있은 1945년 뒤 제2의 가쓰라-태프트 체제는 복원됩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말은 사람과 사람의 뜻을 통하는 것이라. 한 말을 쓰는 사람끼리는 그 뜻을 통하여 살기를 서로 도와주므로 그 사람들이 절로 한 덩이가 지고, 그 덩이가 점점 늘어 큰 덩이를 이루나니, 사람의 제일 큰 덩이는 나라라. 그러하므로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인데,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이러하므로 나라마다 그 말을 힘쓰지 아니할 수 없는 바니라.” 이 말은 말이 겨레의 정체성이요, 독립 번영의 연장이라는 뜻으로 110년 전인 1914년 오늘(7월 27일) 세상을 뜨신 한힌샘 주시경 선생(1876~1914)이 하신 말씀입니다. 평생 배달말(우리말)을 올곧게 사랑하고 실천하고 가르치신 주시경 선생은 우리 말글을 갈고 닦아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암울한 시대에 국권을 회복하고 겨레의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큰 힘이라고 믿었던 분입니다.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당시 유일하게 한글을 가르친 교육자로 “주보따리”란 별명처럼 커다란 책보를 끼고 동분서주했지요. 선생은 언제나 한복 두루마기 차림이었는데 한복 속에 우리 겨레의 얼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훈민정음을 언문(諺文), 가갸글, 조선글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작은 연못 - 김민기 깊은 산 오솔길 옆 자그마한 연못엔 지금은 더러운 물만 고이고 아무것도 살지 않지만 먼 옛날 이 연못엔 예쁜 붕어 두 마리 살고 있었다고 전해지지요. 깊은 산 작은 연못 어느 맑은 여름날 연못 속에 붕어 두 마리 서로 싸워 한 마리는 물위에 떠오르고 여린 살이 썩어 들어가 물도 따라 썩어 들어가 연못 속에선 아무것도 살 수 없게 되었죠 아침이슬, 상록수, 작은 연못, 내나라 내겨레, 공장의 불빛, 친구, 봉우리, 늙은 군인의 노래 등 수많은 명곡을 세상에 남긴 김민기는 지난 7월 21일 73살 삶을 내려놓고 영면에 들었다. 지난 4월 SBS스페셜 3부작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 다큐를 보면서 존경의 마음을 금할 수 없었던 김민기가 세상을 뜬 것이다. 조승우, 설경구, 황정민 등 유명 영화배우와 김광석 같은 전설적인 가수를 키워낸 김민기는 대학로 학전을 운영하면서 늘 ‘뒷것’을 자처했다. 그는 연극계에 처음 계약서를 도입하고 수입을 공개한 다음 일일이 배우들과 제작진들에게 고마움을 담아 월급을 주었음은 물론 배고팠던 배우들의 밥을 꼭 챙겼다는데 배우들은 앞것, 자기는 앞것들의 뒤를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으니 관계된 것이 매우 중합니다. 쌀의 품질이 세 가지가 있는데 각기 쓰이는 바는 달라도 모두 먹을 수는 있습니다. 근래에는 인심이 교묘하게 속이기를 잘해서 오직 더 남겨 이익 취할 것만 도모하여 모든 쌀에 모래를 섞는데, 시전(市廛)이나 마을에서 거리낌 없이 통용합니다. 비록 날마다 금하여 다스리지만 조금도 두려워하여 중지하지 않으므로 만약 엄하게 금지 조항을 세우지 않는다면, 징계하여 단절시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7월 19일 치 기록으로 명종이 쌀에 모래를 섞어 파는 미곡상을 엄히 다스릴 필요가 있다는 사헌부의 청에 그렇게 하라고 전교한 내용입니다. 현대에는 일반미를 인기가 좋은 경기미로 포장을 바꾸는 일이나, 중국산 쌀을 국산 쌀로 둔갑시키는 일들이 벌어져 미곡상이 처벌받는 일이 있었지만, 조선시대엔 얼마나 먹거리가 부족했으면 쌀에 모래를 섞었을까요? 조선시대 대부분 가난한 백성은 가뭄과 큰비로 흉년이 들면 먹을 것이 없어 흙까지 먹을 정도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런 백성의 굶주림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가장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