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자장법사가 중국으로 유학해 ‘대화지’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갑자기 신인(神人)이 나와서 신라가 처한 어려움을 물었고, 이에 자장이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잇닿았고, 남으로는 왜국에 이어졌으며,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가 번갈아 국경을 침해 큰 우환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신인은 신라가 여자를 임금으로 삼아 덕은 있어도 위엄이 없으므로 이웃 나라에서 침략을 도모하는 것이니 빨리 본국으로 돌아가라 했다. 자장은 이에 ‘내가 귀국한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습니까?’라고 되묻자 신인은 황룡사의 호법룡(護法龍)이 바로 자신의 큰아들이므로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면 주변 아홉 나라가 복종하며, 왕실이 영원히 편안할 것이라고 말했다.” 위는 《삼국유사》에 있는 ‘황룡사구층목탑’을 세우게 된 연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은 선진 기술을 가지고 있던 백제의 탑 기술자 아비지를 초청해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했다고 하지요. 그런데 1층부터 차례로 일본, 중국, 오월(吳越,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오나라와 월나라)-, 탁라(托羅, 삼국시대 제주에 있던 나라), 응유(鷹遊, 백제를 낮추어 부르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사람의 밥이 되어 - 허홍구 오늘 왔다가 오늘 가는 하루살이의 생명도 위대하게 왔으리 길바닥에 떨어져 뒹구는 나무 이파리도 신비롭게 왔다가 가느니 내 작은 한 톨의 쌀로 몸 받아 올 때 하늘과 땅이 있어야 했고 밤낮이 있어야 했고 해와 달 비바람이 있어야 했다 농부의 얼굴을 뙤약볕에 그을리게 했고 애간장을 녹이게 했고 손마디가 굵어지도록 일하게 하고 땀 흘리게 했다 이제 사람의 밥이 되어 나를 바치오니 작은 이 몸이 어떻게 온 것인지를 일깨워 부디 함부로 하지 말게 하소서 24절기 ‘춘분(春分)’이 얼마 전이었다. 춘분은 겨우내 밥을 두 끼만 먹던 것을 세 끼를 먹기 시작하는 때다. 지금이야 대부분 사람이 끼니 걱정을 덜고 살지만, 먹거리가 모자라던 예전엔 아침과 저녁 두 번의 식사가 고작이었다. 그 흔적으로 남은 것이 “점심(點心)”인데 아침에서 저녁에 이르기까지의 중간에 먹는 간단한 간식을 말하는 것이다. 곧 허기가 져 정신이 흐트러졌을 때 마음(心)에 점(點)을 찍듯이 그야말로 가볍게 먹는 것을 말한다. 우리 겨레가 점심을 먹게 된 것은 고려시대부터라 하지만, 왕실이나 부자들을 빼면 백성은 하루 두 끼가 고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四友相須獨號君 네 친구가 서로 어울리되 너만을 임금이라 함은 中書總記古今文 고금의 문장을 너만으로 쓰기 때문이리라. 銳精隨世昇沈別 출세하고 낙오함도 네 힘에 달렸고 尖舌由人巧拙分 영리하고 우둔함도 네 혀끝에 달렸도다. 김삿갓이 지은 “붓”이란 제목의 시입니다. 예전 문방사우(文房四友)의 하나였던 붓은 보통 짐승 털로 만든 모필(毛筆)이었지만 그 밖에도 대나무로 만든 죽필(竹筆), 볏짚으로 만든 고필(藁筆), 닭 목의 털로 만드는 닭털붓 같은 것도 있었습니다. 특히 가장 많이 쓰였던 것은 양털로 만든 양호필(羊毫筆)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족제비털로 만든 황모필(黃毛筆, 황서붓-黃鼠筆)이 유명했으며, 중국 문헌에서는 이 붓을 낭미필(狼尾筆)ㆍ서랑모필(鼠狼毛筆) 또는 성성모필(猩猩毛筆)이라 했는데, 일찍부터 중국에 수출되었지요. 그밖에 붓을 만드는 털로는 노루 앞가슴 털로 만들어 붓 가운데 가장 부드럽다는 장액필(獐腋筆)을 비롯하여 여우ㆍ토끼ㆍ이리ㆍ사슴ㆍ호랑이ㆍ산돼지ㆍ살쾡이ㆍ담비ㆍ개ㆍ말은 물론 쥐수염까지도 붓으로 쓰였습니다. 20여 년 전에만 해도 누구나 썼던 만년필ㆍ볼펜마저도 이젠 별로 쓰지 않고, 모든 걸 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설중매 짓밟고 / 살 속으로 파고들던 바람 / 어느새 꽃샘추위 밀어내고 / 환한 봄바람으로 변신하던 날 / 끝내 하늘도 응고된 기다림 풀어 / 꿈으로 꿈으로 내려온다네 / 그 꿈 대동강 물도 다 녹여 / 흐르게 하나니.” - 박신영 “우수의 꿈” - 오늘은 입춘에 이어 24절기의 두 번째로 우수(雨水)다. 우수는 말 그대로 눈이 녹아서 비가 된다는 뜻인데 이때가 되면 추운 북쪽지방의 대동강물도 풀린다고 했다. 아직 추위가 남아있지만 저 멀리 산모퉁이에는 마파람(남풍, 南風)이 향긋한 봄내음을 안고 달려오고 있을 거다. 꽁꽁 언 강물도 풀리듯 우수에는 불편했던 이웃과 환하게 웃는 그런 날이 되기를 비손해본다. 예부터 우수 때 나누는 인사에 "꽃샘잎샘에 집안이 두루 안녕하십니까?"라는 말이 있으며 "꽃샘잎샘 추위에 반늙은이(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라는 속담도 있다. 이 꽃샘추위를 한자말로는 꽃 피는 것을 샘하여 아양을 떤다는 뜻을 담은 말로 화투연(花妬姸)이라고 한다. 봄꽃이 피어나기 전 마지막 겨울 추위가 선뜻 물러나지 않겠다는 듯 쌀쌀하지만 봄은 이제 코앞에 다가와 있다. 코로나19로 꽁꽁 얼어붙었던 우리네 마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날 백발 한심하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없이 가버렸으니 왔다 갈 줄 아는 봄을 반겨헌들 쓸 데 있나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 이는 단가의 하나인 ‘사철가’의 부분이다. 단가는 판소리를 부르기에 앞서 목을 풀기 위해 부르는 짧은 노래다. 단가는 ‘사철가’ 말고도 ‘진국명산’을 비롯하여 ‘장부한(丈夫恨)’ㆍ‘만고강산(萬古江山)’ㆍ‘호남가(湖南歌)’ㆍ‘죽장망혜(竹杖芒鞋)’ㆍ‘고고천변(皐皐天邊)’ 따위로 50여 종이 넘지만, 오늘날 10여 종이 불릴 뿐이다. ‘사철가’에서는 “봄은 찾아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하더라”라고 소리한다. 그러면서 “봄아! 왔다가 갈려거든 가거라!”라고 하면서 꽃이 핀 봄을 놓아버린다. 이제 낼모레면 춘분(春分)이고 진달래, 산수유 등 꽃이 피어 드디어 춘색(春色)이 완연한 봄이 오고 있다. 하지만, 공주를 대신하여 흉노로 시집간 왕소군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 곧 “봄이 와도 봄 같지 않구나”라고 노래했다. 그녀는 “옷에 맨 허리끈이 저절로 느슨해지니(自然衣帶緩) 가느다란 허리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겨레신문 2월 15일 치 신문 1면에는 대문짝만하게 대통령 후보들의 사진을 올려놓고 제목을 “펜데믹 이후 한국사회 ‘리셋의 시간’”이라고 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 제목을 좀 길더라도 ”지구촌 돌림병 대유행 이후 한국사회 ‘재시동의 시간”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책이건 신문이건 글을 쓰는 바탕은 쉽게 쓰기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어려운 한자말이나 외래어 또는 외국어를 써서는 안 되겠지요. 이 기사를 쓴 기자는 굳이 ’펜데믹‘, ’리셋‘이라는 말을 써야 유식한 것이라고 착각하는 모양이지만 그건 잘난 체와 다름없습니다. 심지어 <우리문화신문>에 들어오는 보도자료들을 보면 기자나 편집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어려운 말을 쓰는 곳들이 제법 많습니다. 그래서 나는 해당 보도자료를 쓴 곳에 전화를 걸어 이 기사를 읽는 독자들을 생각해 봤느냐고 묻습니다. “’보도자료‘란 더 많은 이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일 텐데 이렇게 어려운 말을 쓴다면 짜증 내는 독자가 더 많지 않겠느냐?”라고 물으면 “죄송하다”라는 답변이 돌아옵니다. 그러면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우리말로 바꿔쓰려고 애를 씁니다. 보도자료를 쓴 담당자에게 묻는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제20대 대통령선거가 21일 앞으로 다가왔다. 따라서 요즘 우리나라는 주요 후보자 4명의 정책과 소식이 넘쳐나 다소 혼란스럽기 조차 하다. 그런데 주요 후보자들의 다짐이나 선거운동을 보면 온통 정치와 경제 얘기뿐이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세상은 정치나 경제만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광복 뒤 백범 김구 선생은 우리에게 이런 말을 남기셨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문화를 외면하고 살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의 대통령도 문화에 관한 생각이 남달라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라면 오로지 국민만을 위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이끌어야 한다. 역대 임금 가운데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꼽는 세종임금은 576년 전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고 오로지 백성을 위해 훈민정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내일은 한해 가운데 보름달이 가장 크고 밝다는 정월대보름입니다. 정월은 예부터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 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비손하며 점쳐보는 달이라고 했습니다. 《동국세시기》에 "초저녁에 횃불을 들고 높은 곳에 올라 달맞이하는 것을 망월(望月)이라 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운수가 좋다."라고 하여 이날은 남녀노소 떠오르는 보름달을 보며 저마다 소원을 빌었습니다. 이날 풍속에 가운데는 “용알뜨기”도 있습니다. 용알뜨기란 부인들이 닭이 우는 것을 기다렸다가 남들보다 먼저 우물에 가서 물을 긷는데 정월 대보름날 새벽에 이 물을 떠오는 것은 집안에 복을 가지고 오는 것이므로 복(福)물, 수복수(壽福水), 복물뜨기, 복물퍼오기, 용물뜨기, 새알뜨기라고도 합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황해도와 평안도 풍속에 보름 전날 밤 닭이 울 때를 기다려 집집마다 바가지를 가지고 서로 앞 다투어 우물에서 정화수를 길어온다. 이것을 용알뜨기라 한다. 맨 먼저 물을 긷는 사람이 그해의 농사를 제일 잘 짓는다.”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정월대보름 먹거리로는 오곡밥과 나물을 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홍석모(洪錫謨)가 쓴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각사의 서리배(관아에 딸려 말단의 행정 실무에 종사하던 이들)와 각 군영의 장교와 군졸들은 종이에 이름을 적어 관원과 선생의 집에 들인다. 문 안에는 옻칠한 소반을 놓고 이를 받아두는데, 이를 세함(歲銜)이라 하며, 지방의 관청에서도 이러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1819년 김매순(金邁淳)이 한양(漢陽)의 세시기를 쓴 책 《열양세시기(洌陽歲時記)》에 따르면, 설날부터 정월 초사흗날까지는 승정원과 모든 관청이 쉬며, 시전(市廛) 곧 시장도 문을 닫고 감옥도 비웠다고 합니다. 이때는 서울 도성 안의 모든 남녀가 울긋불긋한 옷차림으로 왕래하느라고 떠들썩했다 하며, 이 사흘 동안은 정승, 판서와 같은 고위 관원들 집에서는 세함만 받아들이되 이를 문 안으로 들이지 않고 사흘 동안 그대로 모아 두었다고 하지요. ‘세함(歲啣)’이란 지금의 방명록(芳名錄) 또는 명함과 비슷합니다. 흰종이로 만든 책과 붓ㆍ벼루만 책상 위에 놓아두면 하례객이 와서 이름을 적었습니다. 설이 되면 일가친척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해야 해서 집을 비울 수 있는데 그사이 다른 세배객이 찾아오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리의 큰 명절 설날(2월 1일)이 지나 사흘 뒤면 24절기가 시작되는 ‘입춘’이다. 입춘은 대한과 우수 사이에 있는 음력 정월(正月) 절기(節氣)로 해가 황경(黃經) 315도에 있을 때다. 음력으로는 섣달에 들기도 하고 정월에 들기도 하며, 윤달이 들어있는 해에는 반드시 섣달(12월)과 정월에 입춘이 두 번 들게 된다. 이것을 복입춘(複立春), 또는 재봉춘(再逢春)이라고 한다. 입춘 전날은 절분(節分)으로 불리고, 철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해넘이'라고도 불리면서 이날 밤 콩을 방이나 문에 뿌려 마귀를 쫓고 새해를 맞이한다. 입춘의 대표적 민속 입춘방 입춘이 되면 새봄을 맞이하는 뜻으로 대궐에서는 신하들이 지은 '춘첩자(春帖子)'를 붙이고, 민간에서는 '춘련(春聯)'을 붙인다. 특히 양반 집안에서는 손수 새로운 글귀를 짓거나, 옛사람의 아름다운 글귀를 따다가 춘련을 써서 봄을 축하하는데 이것을 '춘축(春祝)'이라 하며, 입춘방, 입춘축이라고도 한다. 이때, 대구를 맞추어 두 구절씩 쓴 춘련을 '대련(對聯)'이라 부른다. 이 춘련들은 집안의 기둥이나 대문, 문설주 등에 두루 붙인다. 대련에 흔히 쓰이는 글귀는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