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한 잔 술을 차려 놓고 ‘우리 상진아’ 하고 가슴을 치면서 고한다. 네가 죽던 날, 주검을 수레에 싣고 돌아왔을 때는 성안에 있는 네 벗들이 모두 너를 어루만지면서 울음을 터뜨렸었다.(…) 길거리에 가득한 남녀들이 상여를 따라 통곡하자, 길을 가던 남모르는 나그네까지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으니….”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 의사(義士)의 삼년상을 마치던 날 대한제국 홍문관 교리였던 박 의사의 아버지 박시규가 비통한 심정으로 지은 제문 일부입니다. 박상진 의사는 나라를 잃은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 평양법원 판사로 발령받았지만, 곧바로 사직하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박 의사는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풍기광복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체 격인 대한광복회 출범식을 가졌는데 박상진 의사는 대한광복회 총사령이 되었지요. 대한광복회 강령을 보면 부호에게서 군자금을 반강제적으로 기부 받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고,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위한 학교를 세워 운영하며, 나라 밖에서 무기를 사서 일본인 고관이나 한국인 친일 인물들을 수시로 처단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박상진 의사는 독립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국가무형문화재 가운데는 제121호 ‘번와장(翻瓦匠)’도 있습니다. ‘번와장’이란 지붕의 기와를 시공하는 장인을 뜻합니다. 지난 2008년 불타고 이후 5년이 지난 2013년 복원된 숭례문, 그 숭례문의 복원에는 여러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함께 고생했지만, 이 가운데 번와장 이근복 선생도 큰 몫을 했습니다. 우리 전통 건축에선 기와가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번와장은 없어서는 안 되는 장인입니다. 한국 전통문화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곡선의 아름다움인데, 특히 한국 건축의 중요한 요소인 기와지붕은 그 곡선미를 가장 잘 나타내주는 부분 가운데 하나입니다. 따라서 지붕의 조형적 특징은 기와를 잇는 전통 번와기법과 그 기술을 가진 번와와공, 곧 번와장이 좌우하는 것이지요. 여기서 기와를 만드는 것은 ‘번와(燔瓦)’이며, 기와 덮는 일이 ‘번와(翻瓦)’라고 하므로 기와 덮는 장인을 ‘번와장’이라고 부릅니다. 요즘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덕에 각 시ㆍ도에 한옥마을과 같은 한옥촌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짓는 한옥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번와장이 찬여하지 않은 탓으로 지붕이 직선 모양으로 곧추서 일본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능 소 화 - 황인동 나는 당신이 걱정이고 당신은 내가 걱정이고 걱정은 또 모든 게 궁금하다 그래서 나는 담을 넘는다 ‘하늘을 능가하는 꽃’이란 뜻이 담긴 능소화(凌霄花), 여름꽃이다. 그 많던 봄꽃이 다 지고 잠시 쉬는 사이 수줍은 주황빛 옷을 입고 흐드러지게 핀다. 다만, 능소화는 활짝 피어 이틀 정도 지나면 통꽃으로 뚝뚝 떨어지는데 그 기개가 독야청청하는 양반을 닮았다고 해서 '양반화'라고도 불린다. 능소화에는 하룻밤 성은(聖恩)을 입었던 궁녀 ‘소화’ 이야기가 전한다. 성은을 입었지만, 임금에겐 끝내 잊힌 슬픈 궁녀 소화. 그녀는 다시 찾지 않는 임금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지쳐 죽었고, 그 소화가 환생해 피웠다는 꽃이 능소화다. 그러기에 담장 너머가 궁금할 수밖에 없었던 능소화는 그렇게나마 오늘도 높은 담장을 넘어서고 있는가? 고즈넉한 시골집 돌담이나 회색빛 삭막한 도시의 시멘트 담처럼 담장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 10m까지도 담쟁이덩굴처럼 올라가 담장 너머 세상을 보려는 능소화. 황인동 시인은 <능소화>라는 시에서 “나는 당신이 걱정이고 / 당신은 내가 걱정이고 / 걱정은 또 / 모든 게 궁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임금의 나들이나 군대의 행진 때 연주하는 ‘대취타’에는 <나각(螺角)>이라는 악기도 있습니다. 이 나각은 길이가 40cm정도 되는 큰 소라의 살을 꺼내고, 꽁무니 뾰족한 끝부분을 갈아 취구(吹口, 나팔ㆍ피리 등의 입김을 불어 넣는 구멍)를 만들어 끼웁니다. 일정한 크기는 없으며 소라의 원형 그대로 쓰기도 하고, 천으로 거죽을 씌우기도 하며 속에 붉은 칠을 하여 치레하기도 하지요. <나각>은 《조선왕조실록》에는 ‘나(螺)’ 또는 ‘소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는 고려 의종 때 각종 의장을 갖는 행렬의 수레 뒤에 따르던 취라군(吹螺軍)이 이 악기를 불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있습니다. 궁중 잔치와 군악에 사용되었고,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가운데 〈정대업(定大業)〉의 춤 일무(佾舞)에도 쓰였지요. 지금은 대취타(大吹打)에 쓰이고 있는데, 특히 또 다른 악기 ‘나발’과는 엇갈리며 번갈아 연주합니다. 이 악기는 뱃고동 소리를 닮은 낮은 외마디 소리를 낼 뿐이지만 웅장하고 우렁찬 지속음을 냅니다. 연주법은 나발과 같이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로 김을 불어넣어 입술의 진동으로 ‘뿌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7월 23일 전라북도 남원에서는 남원 가야고분군 유네스코 등재 반대를 위한 시민역사 특강이 열렸습니다. 사실 우리 문화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면 크게 환영할 일인데도 그걸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다는 것은 깜짝 놀랄 일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남원이 고대 기문국이었다고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기문국이 한국 가야사의 지명이 아닌 일본 명치시기의 정한론자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핵심 인물들이 만든 “가야사=일본서기 임나사”라는 논리에 의한 것이라는데 충격을 받은 것입니다. 이날 초청 강사로 나선 이덕일 순천향대 교수는 엄연히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통해 가야사를 정립하면 되는데 한국 사학계가 조선총독부 학자들의 정립해 놓은 대로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불신론을 내세워 가야 건국사를 부정하고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 임나사로 주장하고 있는 현실을 크게 질타했습니다. 일본 우익의 정사 교과서 역할을 하며 항상 정한론의 동기로 작용한 《일본서기》 내용을 한국 학자들이 증명해 주는 것이라는 얘기지요. 특히 이날 한 남원 시민은 남원이 일본서기 임나의 기문국으로 해설된 ‘유곡리, 두락리 고분군’이 유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그 무서운 괴질이 경성에서도 발생되야 일면 경찰당국은 교통차단을 하고 위생당국에서는 괴질예방주의서를 인쇄하야 돌리고, 일반 인심이 흉흉한데 이에 대하야 의사 김용채 씨는 말하되 “요사히 괴질을 예방하기 위하야 약을 먹어 예방하는 데는 (가운데 줄임) 염산이라는 물약을 양약국에 가서 사서 백배 되는 물에 타서 식후에 하루 삼시로 먹으면 관계치 않을 것이요...” 위는 동아일보 1920년 8월 7일 기사의 일부입니다. 당시도 돌림병이 돌아 사람들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역력한데 그 가운데 돌림병을 예방하기 위하여 염산에 물 백배를 타서 마시라는 의사가 있었으니 어이가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도 예방주사를 맞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일인지라 3면 머리기사에는 “맹렬한 괴질군! 수(遂)히 경성에 쇄도 속히 주사하라! 속히 주사하라!”는 제목으로 예방주사 맞을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만연으로 큰 혼란 속에 일본에서 열린 올림픽도 겨우겨우 끝을 냈고, “'코로나19 종식' 선언했던 중국서 확진자 급증.. 항공ㆍ철도망 차단”, “일본 코로나19 누적 확진자 100만 명 넘었다”, “美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복날의 마지막 말복(末伏)입니다. 올해는 초복과 중복이 열흘 만에 온 것과 달리 중복과 말복은 스무날(20일) 차이인데 이를 우리는 월복(越伏)이라고 합니다. 1614년 이수광이 펴낸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책 《지봉유설(芝峰類說)》에 보면 복날을 '양기에 눌려 음기가 바닥에 엎드려 있는 날'이라고 함으로써 사람들이 더위에 지쳐있을 때라고 하였습니다. ‘음양오행’에 따르면 여름철은 '화(火)'의 기운, 가을철은 '금(金)'의 기운인데 가을의 '금‘ 기운이 땅으로 나오려다가 아직 '화'의 기운이 강렬하므로 일어서지 못하고, 엎드려 복종하는 때라고 합니다. 그래서 엎드릴 '복(伏)'자를 써서 '초복, 중복, 말복'이라고 하지요. 또 최남선이 쓴 《조선상식(朝鮮常識)》에는 복날을 '서기제복(暑氣制伏)'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서기제복에서 ‘복(伏)’은 꺾는다는 뜻으로, 복날은 더위를 꺾는 날 곧, 더위를 피하는 피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복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장마가 끝나고 입추와 말복 무렵이 되면 날씨가 좋아 햇볕이 내리쬐는 시간이 많아서 벼가 자라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평안도 연변(沿邊) 각 고을 구자(口子, 소규모 초소)의 적변을 정탐하는 사람은, 한 군데마다 열 명을 정원으로 하여, 평상시에는 2교대로 나누어 근무하고, 변고가 생기면 번을 합해서 운영합니다. (가운데, 줄임) 그 근무자 가운데 정탐꾼이 4백 9명인데...“ 이는 《세종실록》 28년(1446년) 1월 4일의 기록으로 여기서 말하는 정탐꾼 곧 체탐인(體探人)은 요즘 말로 하면 첩보원으로 조선 초 세종대왕 때 주로 활약했습니다. 그 까닭은 조선 건국 초기 북방 영토를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려 이래 현지의 토착세력이었던 여진족이 수시로 변경을 넘어와 약탈과 납치를 일삼았고, 이에 조선은 곳곳에 성과 목책을 쌓고 방어에 치중하는 것은 물론 수시로 체탐인(體探人)을 파견하여 여진족의 거주지나 세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다음 대규모 군사를 동원하여 정벌하곤 했지요. 또한 체탐인은 북방지역뿐만 아니라 왜인들이 드나들던 남해안에서도 활약했고, 대마도에 보내 체탐 해오기도 했습니다. 이들 목숨을 걸고 활약했던 체탐꾼은 하루를 정탐하면 15일의 휴가를 주었으며, 3년마다 50명 중 1명을 뽑아 6품 이하의 산관직 곧 정식 문관이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심정이 되어 - 이 윤 옥 사나이 세상에 태어나 조국을 위해 싸우다 죽는 것 그보다 더한 영광 없을 지어니 비굴치 말고 당당히 왜놈 순사들 호령하며 생을 마감하라 (가운데 줄임) 아들아 옥중의 아들아 목숨이 경각인 아들아 아! 나의 사랑하는 아들 중근아.” 배달겨레의 철천지원수 이등박문을 쏴 죽인 우리의 위대한 영웅 안중근 장군. 그런데 우리의 영웅 안중근 뒤에는 안중근보다 더 당당한 어머니 조마리아 애국지사(본명 조성녀, 미상 ~ 1927.7.15)가 있었다.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길 원하지 아니한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刑)이니 결코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떳떳하게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라고 죽음을 앞둔 옥중의 아들 안중근에게 편지를 보내는 어머니 조마리아는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는 1926년 조직된 상해재류동포정부경제후원회(上海在留同胞政府經濟後援會) 위원을 지냈다. 또한, 같은 해 9월 3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경제후원회 창립총회에서 안창호ㆍ조상섭 등과 함께 정위원(正委員)으로 선출되어 활동함으로써 안중근의 어머니로서뿐만 아니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24절기 가운데 열셋째 입추(立秋)다. 입추는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후인데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고려사》 권84 「지(志)」38에 “입추에는 관리에게 하루 휴가를 준다.”라는 내용이 보인다. 입추는 곡식이 여무는 시기여서 이날 날씨를 보고 점친다. 입추에 하늘이 맑으면 만곡(萬穀)이 풍년이라고 여기고, 이날 비가 조금만 내리면 길하고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여겼다. 또한 천둥이 치면 벼의 수확량이 적고 지진이 있으면 다음 해 봄에 소와 염소가 죽는다고 점쳤다. 다만, 가을이 들어서는 때라는 입추가 왔어도 이후 말복이 들어 있어 더위는 아직 그대로인데 입추가 지난 뒤의 더위를 남은 더위란 뜻의 잔서(殘暑)라 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더위를 처분한다는 처서에도 더위가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옛사람들은 왜 입추를 말복 전에 오게 했을까? 주역에서 보면 남자라고 해서 양기만을, 여자라고 해서 음기만 가지고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중첩되게 가지고 있다는 얘기인데 계절도 마찬가지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려면 연결되는 부분이 있어야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