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階前偃蓋一孤松(계전언개일고송) 계단 앞에 누운 듯 서 있는 한 그루의 외로운 소나무 枝幹多年老作龍(지간다년로작룡) 가지와 줄기는 여러 해 지난 늙은 용의 모습이네 歲暮風高揩病目(세모풍고개병목) 해 저물고 바람 높을 제 병든 눈을 비비고 보니 擬看千丈上靑空(의간천장상청공) 마치 천 길의 푸른 하늘로 솟아오를 듯하네 이는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서화가ㆍ시인인 강희안(姜希顔)의 <사우정영송(四友亭詠松)>이란 한시입니다. 사우정에 올라 소나무를 보고 노래한 영물시(詠物詩, 자연과 현실 속에서 구체적인 사물을 대상으로 하여 정확하고 세밀하게 묘사한 시)로, 노송(老松)의 위용(偉容)을 눈앞에서 보는 듯 생동감 있게 잘 묘사했지요. 사우정 앞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데, 마치 누워 있는 듯 비스듬히 가지와 줄기를 드리우고 있는데 마치 늙은 용이 승천하기 위해 꿈틀거리는 듯합니다. 해는 저물고 센 바람이 부는 날 가물가물한 눈을 비비고서 노송(老松)을 바라보니, 천 길이나 되는 푸른 하늘로 솟아오를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조선 후기 문신 홍만종(洪萬宗)은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이 시에 대해 “격조가 가장 높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 연예인들이 나와서 ‘내 와이프가 어쩌구“ 하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분명히 우리말 ’아내‘가 있는데도 영어를 쓰는 것을 보면서 참 답답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함께 우리 겨레가 아내와 남편 사이에 쓰는 부름말(호칭어)은 ’여보‘와 함께 ‘임자’를 썼습니다. 알다시피 ‘임자’는 본디 ‘물건이나 짐승 따위를 제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요즘에는 ‘주인’이라는 한자말에 밀려서 자리를 빼앗겼지만, 우리 겨레는 아내와 남편 사이에 부름말로 쓴 것이지요. 아내는 남편을, 남편도 아내를 “임자!” 이렇게 불렀는데 서로가 상대를 자기의 ‘임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서로가 상대에게 매인 사람으로 여기고 상대를 자기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것이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조금도 높낮이를 서로 달리하는 부름말을 쓰지는 않았고 ‘임자’라는 말로 평등한 사이였음을 드러냈습니다. 요즘도 가끔 남편이 아내에게 낮춤말을 하면서 이른바 ‘남존여비’를 드러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은 일제 침략 기간에 남긴 일본 사람들 말법의 찌꺼기라고 합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 높낮이가 없다는 사실은 가리킴말(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우 리 는 - 김태영 내가 쓸쓸할 때는 혼자 걷는 너를 생각한다. 내가 울면서 너를 위로하면 너는 웃으면서 나를 위로한다. 우리는 외롭지 않다. 중국 춘추시대 종자기는 거문고 명인 백아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좋다. 우뚝하기가 마치 태산 같구나.” 하였고, 흐르는 물을 마음에 두고 연주하면 “좋다 도도하고 양양하기가 마치 강물 같구나.” 했을 정도로 백아의 음악을 뼛속으로 이해했던 벗이었다. 그런데 그런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더는 세상에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知音)이 없다고 말한 다음 거문고 줄을 끊고 부순 다음 종신토록 연주하지 않았다. 이는 중국 도가 경전인 《열자(列子) 〈탕문(湯問)〉》에서 유래한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고사성어 이야기로 종자기는 백아를 알아주는 진정 참다운 벗이었다. 진한 우정을 이야기하는 고사성어는 이 ‘백아절현(伯牙絶絃)’ 말고도 ‘관포지교(管鮑之交)’와 함께 ‘금란지교(金蘭之交)’, ‘수어지교(水魚之交)’, ‘단금지교(斷金之交)’, ‘지란지교(芝蘭之交)’, ‘금석지계(金石之契)’ 등이 있다. 특히 ‘지란지교(芝蘭之交)’는 지초와 난초처럼 ‘벗 사이의 향기로운 사귐’을 뜻한다.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문화재청은 지난 7월 15일 한국문화재재단이 조사 중인 경주 ‘탑동유적’ 현장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사람뼈 가운데 키가 180cm인 남성 뼈가 확인되었다고 밝혔습니다. 이는 지금까지 삼국시대 무덤에서 조사된 남성 사람뼈의 평균 키 165cm를 훨씬 넘는 것으로, 현재까지 확인된 삼국시대 피장자 가운데 가장 큰 것입니다. 보존상태 역시 거의 완벽하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조사 현장에서 긴급히 이루어진 형질인류학적 조사를 통해, 해당 피장자가 척추 변형 곧 비정상적으로 척주가 활처럼 굽었음이 확인되어 눈길을 끕니다. 앞으로 정밀한 고고학적 조사와 병리학적 연구를 통해 피장자가 당시 어떠한 육체적 일을 하였는지와 직업군을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탑동 유적 발굴조사 과정에서부터 전문 연구자를 통한 정밀한 사람뼈 노출과 기록, 수습ㆍ분석을 지원하고 있으며, 앞으로 사람뼈를 통한 형질인류학적ㆍ병리학적 연구를 계획 중입니다. 따라서 신라인의 생활ㆍ환경과 장례풍습을 밝혀내고, 나아가 얼굴 복원을 통한 신라 남성의 얼굴을 찾아낼 것으로 기대합니다. 오래된 사람뼈는 과거를 살았던 사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요즘 우리는 열대야와 된더위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여름철 우리는 시원한 냉면을 즐겨 먹게 되지요. 대표적인 냉면에는 메밀가루로 면을 뽑고, 동치미국물로 육수를 한 평양냉면과 메밀 대신 감자로 면을 뽑고 가자미 회를 넣어 비벼 먹는 함흥냉면도 있습니다. 그럼 조선시대 궁궐의 여름철에도 냉면을 먹었을까요? 조선조 정조의 어머니였던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록한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에 보면 “골동면”이란 국수가 나옵니다. 골동면(骨董麵)은 궁중에서 먹었던 음식으로 메밀국수에 쇠고기, 돼지고기, 배, 버섯, 밤, 채소 같은 여러 가지 재료를 넣어 간장 양념에 비벼 먹었던 것입니다. 원래 골동(骨董)은 “오래되었거나 희귀한 옛날의 기구나 예술품”을 말합니다. 또 다른 뜻으로는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것이 한데 섞인 것”을 말하기도 하는데 골동면에서의 “골동”은 바로 이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결국 비빔국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비빔밥의 또 다른 이름이 골동반인 것 역시 같은 까닭입니다. 골동면은 조선 후기 연중행사와 풍속을 설명한 《동국세시기》와 조선 말기에 나온 요리책 《시의전서(是議全書)》에도 나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금으로부터 114년 전 오늘(7월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는 이준 열사가 순국했습니다. 이준 열사는 이상설, 이위종 선생과 함께 고종의 밀서를 받고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가게 됩니다. 세분은 만국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공식적인 한국대표로서 회의 참석을 요청했으나 한국은 이미 일본의 보호국이므로 한 나라를 대표하여 참석할 자격이 없다 하여 거부되었습니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침략을 폭로ㆍ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하여 각국 대표에게 보내는 한편, 언론기관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불러일으켰지요. 그러나 열강의 냉담한 반응으로 회의 참석의 길이 막히자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고 그곳에서 인중 열사는 순국(殉國)에 이르렀으며, 주검은 헤이그의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이준 열사는 이전 1904년에는 친일단체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여 공진회(共進會)가 조직되자, 회장을 맡아 반일투쟁을 주도하다가 황해도 철도(鐵島)에 6달 동안 유배당했지요. 또 1905년 11월 일제가 강압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자 을사늑약의 폐기를 요구하는 ‘지부상소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지난 6월 23일 문화재청은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불삼신불좌상’을 국보 제336호로 지정했습니다. 국보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교조각 가운데 ‘삼신불(三身佛)’로 구성된 유일한 작품으로 조선시대 불교사상과 미술사 연구의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아 왔습니다. 화엄사 대웅전에 모신 3구의 좌상은 1635년(인조 13년) 당대 유명한 조각승인 청헌(淸軒 또는 淸憲)과 응원(應元), 인균(印均)을 비롯해 이들의 제자들이 만든 17세기의 대표적인 불교조각입니다. 모두 3미터가 넘는 초대형 불상이라 보는 이로 하여금 압도적인 느낌을 줍니다. 특히, 삼신불의 복장유물 등 관련 기록이 최근 발견되었으며, 이 기록을 통해 임진왜란 때 불탄 화엄사를 재건하면서(1630∼1636), 대웅전에 모신 삼신불을 제작한 시기(1634∼1635년)와 과정, 후원자, 참여자들의 실체가 더욱 명확하게 밝혀졌습니다. 삼신불좌상은 화려한 연꽃을 갖춘 대좌(臺座, 부처의 앉는 자리)와 팔각형 목조대좌에 다리를 서로 꼰 결가부좌(結跏趺坐) 자세로 앉아 있지요. 참고로 ‘삼신불’이란 그 몸이 법계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연호(年號)”란 임금이 즉위한 해에 붙이던 이름이며, 해의 차례를 나타내려고 붙이는 이름을 말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는 “서기(西紀)”를 쓰고 있지요. 그런데 서기 이전에는 “정삭(正朔)” 곧 중국의 달력을 사용하여 중국의 연호를 같이 썼습니다. 신라는 물론 고려 대부분과 조선에서도 중국의 연호를 썼는데 자주적인 생각이 강하던 때는 독자적인 연호를 쓰기도 했지요. 특히 강성한 나라를 세워 넓은 나라땅을 가졌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즉위한 391년부터 “영락(永樂)”이란 연호를 써서 문헌상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로 기록됩니다. 나라를 세워 멸망할 때까지 내내 독자적인 연호를 쓴 것은 발해가 유일하며, 신라는 진흥왕ㆍ진평왕ㆍ선덕여왕ㆍ진덕여왕 때, 고려는 태조 왕건 이후 4대 광종까지만 독자적인 연호를 썼습니다. 조선왕조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의 제후국이라 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않다가 1895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독자적인 연호 “건양(建陽)”과 “광무(光武)”를 썼는데 이마저도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면서 독자적인 연호는 사라지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제의 연호를 쓰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오늘은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된다는 초복(初伏)이다. 초복은 삼복의 첫날인데 하지 뒤 셋째 경일을 초복, 넷째 경일을 중복, 입추 뒤 첫 경일을 말복이라 하여, 이를 삼경일(三庚日) 또는 ‘삼복’이라 한다. “甲乙丙丁戊己庚辛壬癸(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의 천간(天干)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의 12지지(地支)에서 하나씩 붙여 해(年)와 달(月) 그리고 날(日)을 말하는데 날에 경(庚)이 붙은 날을 경일(庚日)이라 한다. 올해를 보면 오늘 곧 2021년 7월 11일은 셋째 경일 곧 경신(庚申)으로 초복이며, 7월 21일 넷째 경일은 경오(庚午)로 중복, 입추 뒤 첫 경일 곧 8월 10일은 경인(庚寅)으로 말복이다. 복날은 열흘 간격으로 오기 때문에 초복과 말복까지는 20일이 걸린다. 그러나 올해처럼 해에 따라서 중복과 말복 사이가 20일 간격이 되기도 하는 경우 이를 월복(越伏)이라고 한다. 삼복 기간은 한해 가운데 가장 더운 때로 이를 '삼복더위'라 하는데 조선시대 궁중에서는 더위를 이겨 내라는 뜻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에게 빙표(氷票)를 주어 관의 장빙고에 가서 얼음을 타 가게 하였다. 복중
[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용은 12지신 가운데 5번째 동물로 예부터 상서로운 존재로 여겨왔다. 또한 용기와 비상, 희망을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써 사찰의 절 대웅전에 좌정한 부처님의 수호신으로 닷집, 천장에 조각되기도 한다. 신라 문무왕은 “내가 죽으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겠다"라며 감포 앞바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겨 지금도 수중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사적 158호)으로 전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만인지상인 황제의 곤룡포에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 ‘용(龍)’이다. 그런 용을 상징하는 ‘태황 용선경도’라는 그림이 있다. 이는 태황 스님이 기도 중에 현몽을 받아 그리게 된 것으로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 40년 불상을 그린 태황 스님이 아니면 그리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평가다. 스님의 용선경도는 세계 164여 개국의 저작권 협회에 등록된 세계 유일의 작품이다. 인사동에서 평생 그림을 취급한 한 화상(畫商)은 ”용그림의 대가들을 알고 있지만, 태황 스님의 용그림은 그에 견줄 바가 아니다. 이런 용그림은 평생 처음 본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으며, 전율을 느꼈다고 말한다. 특히 태황 스님의 작품들은 자연 친화적인 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