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단국대 국악과 창설 40돌 기림 동문연주회 관련 이야기로 악곡 선정에서부터 연습과정, 출연자들의 열의, 등등이 충실한 편이어서 음악회가 알차고, 수준이 높았다고 이야기하였다. 여러 종목이 선을 보였지마는, 특별히 김계희 동문이 생황(笙簧) 협연자로 나선 협주곡, <저 하늘 너머에>라는 작품은 생황 특유의 아름다운 음색도 음색이려니와 협연자의 자신감 넘치는 연주 태도, 그리고 독주악기와 관현악의 신비로운 대화, 등에서 관객은 압도당한 분위기였다. 생황협연곡과 함께 이원희 동문이 연주해 준 퉁소(洞簫) 협주곡 <풍전산곡>이나 박정숙 동문이 출연한 해금협주곡도 다양한 음색과 기교로 객석의 공감을 얻어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관객이 함께 호흡하며 추임새를 쏟아낸 순서는 단연 <민요연곡>과 <사물놀이와 국악관현악>이었다. 민요연곡은 남도민요와 경기민요를 교차로 불러나가는 형식이어서 자칫하면 다른 음악적 분위기가 충돌하여 어색할 수도 있었지만, 그동안의 연습과정으로 이를 무난하게 풀어낸 점도 이채로웠다. 흔히 보면, 한 무대에서 음 체계가 다르고, 표현법이 같지 않은 두 부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 700회를 맞으며 단국대 국악과 창설 40돌을 기려 동문들이 마련한 음악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였다. 이 행사는 단국대 국악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100여 명의 연주 팀이 참여하였으며 졸업 30년이 넘어 40년이 다 되어가는 환갑의 나이가 된 동문들이 스스로 기획하고, 무대에 올린 음악회였다는 점, 공연 내용도 개인의 독주나 소규모 합주곡 위주가 아니라, 대규모 관현악과 협연곡 위주의 7곡을 발표하였다고 이야기하였다. 당일 연주된 7곡 모두는 협연자들과 관현악단과의 어울림이 무난하여 그동안의 연습과정을 충분히 들어내 주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도 선곡(選曲) 과정에서 퉁소협주곡, <풍전산곡>이라든가, 생황(笙簧)협주곡, <저 하늘 너머에>와 같은 곡들은 쉽게 접하기 어려운 작품들이어서 객석의 반응이 집중되었던 순서였다.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한다. 먼저, 틍소협주곡 <풍전산곡-(風傳山曲)>과 관련된 소감이다. 이 곡은 바람이 전해 준 ‘산의 노래’라는 뜻으로 작곡자(계성원)은“산세가 험준하고 고원지대에 있는 함경도 지역의 민요 <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2011년 4월 1일 시작한 [서한범 교수의 우리음악 이야기]가 오늘(10월 8일)로 700회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문화신문> 독자에게 쉬운 국악속풀이를 해주신 서한범 교수님께 <우리문화신문>은 독자 여러분과 함께 엎드려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편집자 말) 『서한범의 우리음악 이야기』가 이번 주로 700회를 맞는다. 그동안 우리음악 이야기에 관심을 보내주시고, 댓글도 달아 주신 <우리문화신문> 독자 제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글쓴이가 지난 2년여, 601회~699회까지 소개한 이야기들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었다. 지운하와 인천 남사당패 관련 이야기, 임방울 국악제와 2022년 대상을 받은 최잔디의 판소리 심청가 이야기, 고 백인영의 제자들이 올리는 10주기 추모제 관련 이야기, <춘천시립국악단>의 창단공연과 앞으로의 활동방향 이야기, 경기소리 과천대회 이야기, 경기 12잡가 중 어려운 노래, ‘적벽가’로 장원한 장은숙의 이야기, 고 성창순의 제자 어윤경이 스승을 기리며 부르는 ‘심청가’ 이야기, 조선 춤 방에서 만난 민천식의 ‘화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어진 음악으로 세상을 교화(敎化)한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이 정농악회(正農樂會)라는 점, 원로들을 모시고 창립연주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재확인한 내용들이 훗날 후진 양성에 큰 경험과 교훈이 되었다는 점도 이야기하였다. 지금도 초심자를 비롯해, 젊은 국악인들은 쉽고 간단하게 생각하고 있는 음악이 바로 <정악(正樂)>이며, 대표적인 악곡이 ‘영산회상-靈山會相)’이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평생을 걸고 연주해 온 원로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정농악회 창립 발표회를 함께 준비하면서 ‘영산회상’이란 음악을 바라보는 그분들의 시선이나, 음악적 태도가 어떠했는가, 하는 점은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참고로, 영산회상이란 어떤 음악인가? 이 악곡은 《대악후보(大樂後譜)》에 「영산회상불보살」 7글자를 노래하던 성악곡이었으나, 그 이후로 내려오며 가사를 잃고 기악곡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 곡은 편성 악기에 따라 각각의 이름이 다르다. 현악기들이 중심이 되면 ‘현악영산회상’이 되는데, 현악기 가운데서도 거문고가 중심이 된다고 해서 ‘거문고회상’으로도 불린다. 이에 견줘 관악기를 위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정농악회>가 만들어지던 1970년대 중반, 당시에는 순수하게 공부하는 목적으로 서울음대 김정자(가야금 전임), 김선한(거문고 강사), 글쓴이(서한범, 피리 강사), 양연섭(가야금, 양금) 등 젊은 강사들이 ‘원로 사범에게 재교육을 받아 후진들을 지도하자’라는 취지로 조직되었으며 정농의 취지는 바른 음악, 또는 어진 음악을 지어 세상을 이롭게 한다는 취지”였다고 이야기하였다. 정농악회(正農樂會)란 이름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어진 음악이란, 천지의 중화(中和)를 근본으로 한 것이기에 아정(雅正)하고 사(邪)하지 않다. 그러므로 방탕에 흐르지 않고, 어지러움에 이르지 않게 되어 동성상응(同聲相應)과 동기상감(同氣相感), 그리고 동친상애(同親相愛)하여 민족을 화합케 만든다.” <아래 줄임> 당시의 상황도 지금과 비슷했다. 일반 대중들은 물론, 국악 전공자들도 산조(散調)와 같은 민속악(民俗樂)에 견주어 정악(正樂)과 같은 음악들은 재미가 없는 음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공부 모임의 이름도 짓고, 원로들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특별 지도도 받아 가며 정악의 기초를 다시 공부한 지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지인 및 제자들의 추억담 가운데서 구희서, 김매자, 김은희 등이 보내온 내용 일부를 소개하였다. 구희서의 글에서는 “무보(舞譜)에 의해 재현된 궁중무용은 순서는 찾을 수 있지만, 춤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나 멋은 되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선생의 존재 값어치”를 말했고, 김매자는 「창무회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스승님」이 바로 김천흥 선생이었다고 전제하면서 1975년 서울(명동극장)에서 창작공연을 했을 때, 많은 사람이 외면했으나, 선생님만은 격려해 주셨던 점을 기억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리고 김은희는 1997년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첫 학기 때,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공연에서 홍보와 통역을 맡으면서 선생과 인연이 되었다는 점, 당시의 천진난만한 아이와 같은 선생의 미소와 식사 전, 조물주에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는 이야기를 소개해 주었다. 1997년도 하와이 주립대에서 한국 <정농악회(正農樂會)>의 초청 공연이 이루어졌는데, 이 단체는 어떻게 결성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심소 선생의 역할은 어떠했는가? 하는 이야기로 이어가 본다. 우선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가면 안 쓴 처용(處容)이 바로 심소(心韶)”라는 이야기와 5주기 추모문화제 관련하여 전시회와 세미나, 그리고 처용랑(處容郞)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다. 처용은 본래 용왕의 아들이었으나 인간으로 화신(化身)하여 경주에서 왕정을 돕고 있었는데, 부인의 예쁜 미모를 탐하는 역신(疫神)이 인간으로 화신하여 동침(同寢)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에, 역신이 감동하여 사과하고 물러갔으며 이후에는 나라 사람들이 처용의 화상을 대문 앞에 붙여 놓았는데, 역신들이 얼씬거리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심소 선생을 일러 <가면 안 쓴 처용>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것도, 어찌 보면 항상 만면에 미소를 짓고 있는 처용의 모습과 흡사하기 때문이리라. 이번 주에는 생전의 심소 선생과 교분을 나누었던 많은 지인과 제자들이 선생의 삶과 예술을 회고하며 보내온 추억담들이 많은데, 그 가운데 일부를 이 난에 소개해 보기로 한다. 먼저 문화예술평론가 구희서의 <소중한 궁중무용의 생명줄>이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전승계보가 뚜렷하면서도 정작 살아있는 춤의 숫자는 귀한 분야다.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궁중(宮中)음악과 춤의 명인, 99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심소, 김천흥 명인은 천진난만한 미소와 함께 유머와 재담(才談)으로 상대와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주었다는 이야기, 특히 낮은 자세로 임하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해 온 분이었다는 이야기, 등을 하였다. 나는 지금도 심소(心韶), 김천흥 선생을 떠 올리면 잊히지 않는 말과 함께 그 표정이 떠오르는 것이다. 바로 지그시 눈을 감은 선생이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고 생활해 왔다는 자체가 참으로 망극하다”라는 진심어린 표현이다. 얼핏 듣기엔 누구나 갖는 마음씨처럼 보이지만, 액수의 다과(多寡)를 떠나 선생의 순수하고 진심이 담긴 마음씨를 엿보게 만드는 말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선생이 장수할 수 있었고, 건강한 삶을 영위해 온 배경도 자세히 살펴보면 건강식이나 운동이 아니고. 바로 국가와 이웃에 감사하는 마음과 겸손의 미덕을 생활 속에서 실천해 왔다는 점이 주된 요인이 아닐까 한다. 벌써 10여 년 전이다. 심소 김천흥 선생의 5주기 추모문화제가 <국립국악원>과 <심소 김천무악예술보존회> 공동주최로 열린 바 있는데, 당시의 기억을 되돌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금 우리음악이야기는 궁중(宮中) 악무(樂舞)의 대가였던 심소(心韶) 김천흥(1909-2007) 명인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선생은 1922년 14살 때, 5년 과정이었던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李王職雅樂部員養成所)> 제2기생으로 입학하여 정규과정을 밟고 졸업하면서 악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규일(河圭一)에게 정가(正歌), 한성준(韓成俊)에게 민속무를 배웠으며, 1955년도에는 <김천흥 고전무용연구소>를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면서 ‘처용랑(處容郞)’, ‘만파식적(萬波息笛)’과 같은 작품들을 발표하였다. 심소 선생에게 악기나 춤을 배운 제자들은 선생은 웃는 모습이 천진난만하였고, 유머가 풍부하였으며 항상 최선을 다하고 겸손하게 사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일부 글쓴이와의 대화를 소개하였거니와 심소 선생은 <이왕직아악부원 양성소> 졸업한 뒤, 곧바로 아악부에 취직을 했고 그로부터 정규직, 임시직을 가리지 않고 국록(國祿)을 받고 살아왔다는 자부심은 참으로 대단했던 것 같다. 특히 국민의 세금으로 월급으로 받아왔다는 자체가 망극하다는 표현은 참으로 인상적이다.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고, 일하
[우리문화신문=서한범 단국대 명예교수] 지난주에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었던, 혜강이 <해금>을 연주했다고 하는데, 혜강은 어떤 사람이고, 그가 연주했다고 하는 해금은 어떤 악기인가? 하는 이야기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주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악기, 해금은 중국을 통해 고려에 들어 온 이래, 궁중음악과 민속음악 전반, 그리고 근래에는 창작곡 연주에 널리 활용되고 있는 악기라는 점, 일정한 음자리가 없고, 연주자의 음감(音感)으로 연주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음정 관계가 정확해야 한다는 점과, 연주법에 있어서는 줄을 당겨 연주하면서 다양한 농현(弄絃)이 일품이란 이야기도 하였다. 이번 주에는 궁중음악 해금 연주자로서 유명했던 것과 겸해서 아쟁과 양금 연주자로도 유명했던, 아니 음악보다는 오히려 궁중정재(呈才)의 명인으로 더 많은 업적을 낸 김천흥 명인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선생의 아호는 심소(心韶)였다. 심(心)이란 곧 마음이고, 소(韶)는 바로 요순시절의 음악을 뜻하는 말이니, 선생의 성품이나 음악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아호일 것이다. 심소 선생(아래 심소)은 1909년에 태어나 2007년에 영면하였으니 99살을 일기로 평생을 궁중음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