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새해가 다가온다. 사주보러 가는 사람이 많아질 시기다. 한 해가 시작될 무렵, 올해의 길흉화복과 풀리지 않는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철학관은 늘 북적거린다. 미래를 궁금해하고, 미래를 준비하며, 과거를 돌아보는 것은 어찌 보면 생존확률을 높이기 위한 인간의 본능이다. 사주로 과거를 보면 '모든 게 내 잘못은 아니었다'는 위안을, 미래를 보면 '내일이 어제보다 나을 것'이라는 희망을 얻을 수 있으니 이래저래 매력적인 수단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이따금, 사주를 보러 간 여성들은 느닷없이 '팔자 센' 여자가 되어 역술인의 꾸지람(?)에 가까운 해석을 들으며 참담한 기분을 느끼곤 한다. '여자 팔자가 너무 세다', '남자로 태어났으면 더 좋았을 팔자다', '팔자에 남자복이 없다' 등 ... 표현은 다양하지만, 대부분 '좋은 남편을 만나 자식을 잘 낳고 현모양처로 사는 인생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나 과연, 남자에게도 여자복을 놓고 이렇게 '팔자 세다'는 표현을 쓸까? 아마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 것이다. 이성운에 관한 한, '팔자 센 사주'는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사주 해석에 반기를 든 책 《내 팔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누구나 단 한 번 살고, 단 한 번 죽는 인생. 그 한 번의 삶을 어찌 살아야 하는가. 또, 그 삶에 주어진 한 번의 젊음을 어찌 보내야 하는가.” 이는 서른을 맞은 우당 이회영이 자신에게 던진 준엄한 질문이었고, 이후 예순여섯의 나이로 눈을 감을 때까지 전 일생을 바쳐 그 질문에 답하게 됩니다. 이 이회영 선생을 그리는 책 《한번의 죽음으로 천 년을 살다》가 김태빈ㆍ전희경 공저로 레드우드출판사에서 출간되었습니다. 1부와 2부로 나누어진 이 책의 1부에는 이회영 선생과 그 가족의 삶이, 2부에는 우당기념관에서 국립서울현충원까지 이회영 선생과 관련된 장소들이 3개의 코스로 정리되어 있습니다. 특히, 서울에 남은 적지 않은 유적 가운데 사라진 곳과 보기 힘든 곳들을 일러스트로 되살리고 발품을 팔아 생생한 사진을 제공한 점이 돋보입니다. 이회영 선생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오성 이항복의 10대손으로, 선생의 집안은 이항복 이후 6명의 정승과 2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 중의 명문가였습니다. 이회영 선생의 아버지 이유승 역시 한성판윤과 이조판서 등을 지낸 고위관료였고, 6형제의 재산은 대충 헤아려도 오늘날 값어치로 600억이 넘을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김종주 조모께서 섬이 굶주릴 때 크게 베푸셔서 남다른 은혜를 입어 금강산에 들어가기에 이르니 사대부들이 기록하여 전하고 노래로 읊은 것은 고금에 드물다 이 편액을 써서 주어 그 집에 표한다 번역: 김익수 / 김만덕 6대손 김균 기증(2010.04.)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예가 추사 김정희는 제주로 유배 온 뒤, 김만덕의 3대손 김종주에게 편액 하나를 써 준다. 거기에는 ‘은광연세(恩光衍世)’, 곧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넘쳐흐르다’라는 뜻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김만덕은 1739년(영조 15년) 제주에서 양인의 딸로 태어났으나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관가의 기생이 되었다가, 24살이 되던 해 양인 신분을 회복하고 객주를 차려 거상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1794년 사상 최악의 갑인년 흉년으로 제주 인구의 1/3이 굶어 죽고,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구휼미마저 풍랑에 배가 난파되어 받을 수 없게 되자 전 재산으로 쌀 수백 석을 사들여 수많은 백성을 살려냈다. 이에 감동한 정조는 임금을 뵙고 금강산을 유람하는 것이 꿈이었던 김만덕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을 내려 입궐시킨 뒤 친히 그 공로를 칭찬하고,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당인 종묘 다음으로 큰 사당인 칠궁에는 임금을 낳았으나 왕비가 되지 못한 일곱 후궁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은 운 좋게 왕위를 이어갈 왕자를 낳았으나 끝내 왕비가 되지 못했던, 그래서 죽어서도 임금 곁에 잠들 수 없었던 일곱 여인의 삶을 연민과 공감의 필치로 그려낸다. 1392년부터 1910년까지 조선의 왕위를 승계한 27명의 임금 가운데 왕비 소생은 15명에 불과하며, 12명은 방계 혈통이다. 왕비가 왕위를 이어갈 대군을 낳지 못하면 후궁 소생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갔다. 1부 ‘실제 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에서는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칠궁에 들지 못한 공빈 김씨, 경종의 생모로 궁녀에서 왕비까지 초고속 승차한 희빈 장씨, 무수리 출신으로 최장수 왕 영조를 낳은 숙빈 최씨, 명문가에서 간택되어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다룬다. 2부 ‘추존왕을 낳은 칠궁의 후궁들’은 손자 능양군이 왕위를 이음으로써 인생의 만추를 맛본 인빈 김씨, 아들 효장세자가 정조의 양부가 된 덕분에 추존왕 진종의 어머니가 된 정빈 이씨, 추존왕 장조(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 이씨,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의
[우리문화신문=우지원 기자] 부는 바람 뿌리는 비, 성문 옆 지나가는 길 후덥지근 장독 기운 백 척으로 솟은 누각 창해의 파도 속에 날은 이미 어스름 푸른 산의 슬픈 빛은 싸늘한 가을 기운 가고 싶어 왕손초(王孫草)를 신물나게 보았고 나그네 꾼 자주도 제자주에 깨이네 고국의 존망은 소식조차 끊어지고, 연기 깔린 강 물결 외딴 배에 누웠구나 이는 광해군이 제주 유배 시절 지었다는 칠언율시 ‘제주적중(濟州謫中)’이다. 권좌에서 절해고도 섬으로 내쫓긴 패자의 비통하고 고독한 심경이 잘 드러나는 이 시는 국립제주박물관의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 전시에 소개되었다. 국립제주박물관은 ‘제주 섬’ 브랜드 문화를 이끌어가는 기획전시의 하나로 ‘낯선 곳으로의 여정, 제주 유배인’ 이야기를 선보였다. 이 전시는 섬이 가진 다양한 역사문화콘텐츠 가운데 ‘유배’에 초점을 맞춰 유배살이의 다양한 풍경을 소개한 것이다. 유배란 중죄를 지은 사람을 먼 곳으로 보내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로, ‘귀양’, ‘귀향’ 이라고도 한다. 제주는 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의 특성상 천혜의 유배지였고, 고려시대부터 유배지로 이용되기 시작해 조선시대에는 전국에서 유배인이 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