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점 불빛도 없이 개 짖는 소리만 요란한 좁고 더러운 조선인 구역 지나 어두운 밤길을 인력거가 여관방을 향해 달린다 나는 무엇이 좋아 동경의 화려한 네온을 뒤로 하고 조선 땅에 와 있는가 도서관도 없고 강연회도 변변한 음악회도 없는 땅 메이지 40년(1907) 봄 3월 더럽고 누추한 경성에 온 것을 후회하는 총독부어용신문 사장 야마가타 이소오 동양척식회사 땅 3정보 공짜로 빌려 8년간 사과 농사지을 땐 한몫 잡자는 뜻이었겠지 조선인이여! 조선과수사업을 번창케한 구즈미의 공적을 잊지마라 이 달콤한 사과 향기 조선은 깊이 그리고 길이길이 기억하라 외치지만 그 과수 주렁주렁 열리면 조선인 주려했나? -구즈미 구니카쿠의 애플, 이윤옥 시 - 조선의 과수사업을 번창케 한 구즈미를 조선인은 꼭 기억해야 한다고 글을 쓴 야마가타 이소오(山懸五十雄)(1869~1959)는 시가현(滋賀縣) 출신으로 동경제국대학영문과를 중퇴한 엘리트. 형 (山縣悌三郞)이 만들던 소년원(少年園) 잡지 편집에 관여하다가 나중에는 소년문고(少年文庫), 만조보(万朝報)등의 영문담당 기자를 거쳐 경성의 총독부 어용신문인 서울프레스(ソウルプレス) 사장에 취임한다. 이 시절 '경성에는 기생
지난여름 나는 우리문화를 사랑하는 분들의 안내 겸 통역을 맡아 천년고도 교토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일행 중에 고대건축을 공부하는 분이 있어 일본 불교건축의 최고라는 뵤도인(평등원, 平等院)을 보러 교토 남동쪽에 있는 우지시(宇治市)에 갔을 때였다. 일본 돈 10엔짜리 동전 뒷면에 새겨진 뵤도인은 백제계 도래인 후지와라(藤原)가문과 관계가 있는 천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사찰로 뵤도인 앞에 길게 이어진 아름다운 연못 속에 비친 건축물과 푸른 소나무의 휘늘어진 자태는 한폭의 그림 같아 건축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한 번쯤 가볼만한 아름다운 곳이다. 그래서인지 최근에 한국 여행사들도 앞다투어 뵤도인을 새로운 코스로 집어넣고 있어 한국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곳이다. "두 분 모습이 참 아름답습니다." 뵤도인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마주친 기모노 차림의 두 여인과 우리 일행은 신호등 앞에서 만났다. "기레이데스(아름답다)" 기모노 차림의 여인들만 보면 다가가 이 말을 건넨 사람은 모 잡지사 문화부 최 기자로 그 덕분에 우리는 일본전통 옷차림의 많은 여인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아름답다, 예쁘다"라는 말은 여성을 꼬시는(?) 세계 공통어일뿐 실제 모습은 그다지 예쁘지 않았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나듯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다 / 13년간 탐라도에 내동댕이쳐진 스승 /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멀고먼 땅 청나라에서 구한 책/ 눈물로 마주하며 스승과 주고받던 사랑/ 추사 선생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상적의 마음을 그린 것/ 대정고을의 가득한 푸른 솔향기/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아라. -추사 유배지에서 ‘이한꽃’- -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후지츠카 씨는 동경제국대학 중국 철학과를
겨울 추위가 닥쳐봐야 솔의 푸르름이 빛난단다 / 아직 초록이 무성할 땐 아무도 모른단다 / 13년간 까닭 없이 외로운 땅 탐라도 / 내동댕이쳐진 스승 그리며 / 먼 땅 청나라에서 스승께 드릴 책 한 짐을 지고 왔단다 / 눈물겨운 추사 선생 / 붓 들어 세한도를 그린 뜻은 / 제자 이상적 마음을 그린 것이란다 / 그 이름 만고에 남는 것은 / 고독한 스승을 돌본 갸륵함 때문이라고 / 후세 사람들 아낌없이 입을 모은다. -이한꽃 시 ‘이상적 님’- 1945년 1월 동경의 한 병실을 두 달째 끈질기게 드나드는 조선인이 있었다. 서예가 손재형 씨다. 병실에 누워 있는 사람은 66살의 후지츠카(藤塚隣, 1879-1948) 씨로 일제강점기 때 조선 경성제국대학 교수 출신 추사 연구가이다. 손재형 씨가 병실을 드나든 것은 다름 아닌 김정희의 ‘세한도’를 받아내려는 것이었다. 어째서 세한도는 동경의 한 병실에 누워 있는 후지츠카 손에 들어간 것일까? 국보 180호인 세한도의 운명이 일각에 놓였던 그 순간이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양손에 땀을 쥐게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세한도를 받아 낸 3개월 뒤 후지츠카의 조선 보물창고는 미군의 도쿄대공습으로 거의 불타버리고 말
동해 한 점 외로운 섬 독도 고래로 우리가 지켜 온 섬 어느날 오천년 종묘사직 부수고 나라 삼키더니 나가사키 히로시마 폭탄 맞고 되찾은 국토 무슨 심보로 자기땅이라 우기는 가 금세기에 나라 잃고 찾은 반쪽 광복 서럽다해도 그 외로운 섬 우기는 일 더욱 서러워 아! 세상사람들이여 어찌 이 노릇에 침묵하는가! 날강도의 국토 침탈에 어찌 눈감는가! 일본의 지식인들이여 어찌 침묵하는가! 강제로 땅 뺏어 코흘리개 어린애들 책에 실으면 참 역사 바른역사 되는 줄 알지만 하느님은 안다네 그런 억지 그런 생떼 천벌 받아 마땅한 죄 국토 강탈 독도 강탈. ------------------------------------------- 지진참사 와중에도 독도 야욕 드러낸 일본 [논단] 일본은 독도를 교과서에 싣겠다는 선전포고를 즉각 중단하라! 이윤옥 일본 동북부를 강타한 지진으로 한국 방송은 일본처럼 모든 프로그램을 중지하고 24시간 보도 체제로 들어가 경쟁이 치열했다. 지금도 일본 재해 지역의 보도를 시시각각 전하고 있을 만큼 이번 대재앙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크다. 가족을 잃은 사람, 집과 직장을 잃은 사람은 물론이고 아예 마을 자체가 싹쓸이된 모습을 보면
진보쵸 역 내려 와이엠시에이 가던날 빌딩 숲 도로변 팬지꽃 반겼지 한국말 유창한 다즈케 교장 선생님 나그네 반기며 손잡고 안내한 10층 자료실 누런 낡은신문지 속 2.8독립운동에 빛나던 영광의 얼굴 최팔용,김도연,백관수... 스물일곱명 내란음모죄로 잡혀가던 조선 청년들 팔벌려 보듬어 준 사람 후세다츠지 마수 땅와이엠시에이 하느님 보호하사 조선독립만세 열여덟 먹던 해 미야자키 농촌에서 청운의 변호사 꿈꾸며 후세 변호사말했다지 높은 관직 보다 바른 일하며 살고싶다고 군국주의 더러운 진흙 속에 핀 청아한 꽃 한송이 후세 변호사 길이길이 그 이름 기억할지니 기억할지니.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 (布施辰治 1880 ~ 1953.9.13) “부산발 경성행 열차 안에서 일본인들이 무조건 조선인을 하대(下待)하는 것을 보았다. 기차가 지나가는 역 주변에 있는 근사한 조선가옥은 정말 조선인들을 위한 가옥일까? 경성에 2,3층으로 양옥집들이 들어서고 있지만 과연 그것들이 조선인의 삶과 관계가 있을까?” 1923년 8월 3일자 동아일보 新人의 朝鮮印象에서 일본인 변호사 후세다츠지(布施辰治;1890-1953)는 그렇게 조선의 인상을 쓰고 있다. 그 무렵 한다하
그의 집에 갔다 그가 평생을 바쳐 만든 영혼의 집 나가사키 평화자료관 비탈진 언덕길 그의 집을 지키는 천 마리 학 누가 접었나 묻지마라 평화가 입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면 누가 그 작은 색종이에 꿈을 접을까? 노랑 파랑 빨강 그리고 까망 암흑의 날 굴하지 않은 조선인의 투지 마사하루 목사 도와 천 마리 학 접던 고사리 손들 평화는 거기서 조금씩 싹터 오는 법 모진 편견 헤치고 홀로 비바람 막으며 용감히 부르짖었네 일본은 피해국 이전에 아시아에 끼친 해악을 헤아리라고 그를 기억해야한다 천마리 학들이 감싸안은 그 이름 오카마사하루. 조선인의 상처를 보듬은 재일조선인 인권 목사 오카마사하루(岡正治, 1918-1994) “전쟁이나 원폭의 비참함을 언제까지나 가슴속에만 새겨두면 안 된다. 이러한 비참한 결과를 초래한 원인이 일본 측에 있으며 일본의 아시아 침략에 있었음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 일본 자신이 패전으로 받은 상처를 보듬기 이전에 아시아 이웃나라에 고통을 준 역사를 먼저 알지 않으면 평화는 절대 이룩되지 않는다. 일본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외국인들은 전후 50년이 되었어도 아무런 보상도 없이 방치됐다. 가해의 역사가 숨겨졌기 때문이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보
한국에 판소리가 있다면 일본에는 가부키(歌舞伎)가 있다. 둘 다 두 나라의 전통을 대표하는 예술이긴 하지만 둘의 성격은 다르다. 판소리가 큰 동작 없이 고수와 둘이서 소리를 하는 데 비해 가부키는 등장인물도 많고 춤과 노래와 연극적인 요소가 많다. 비슷한 점은 둘 다 공연 시간이 길다는 데 있다. 재미난 것은 가부키는 중간 쉬는 시간에 도시락을 먹고 하는 점이다. 아무리 판소리의 중간 쉬는 시간을 많이 준다 해도 소리꾼은 물 한잔 먹고 목을 추릴 시간이고 관객은 화장실 다녀오는 시간인데 견주어 일본의 가부키는 막간에 먹는 도시락 먹는 재미로 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많이 다르다. 이때 먹는 도시락을 가리켜 마쿠노우치(幕の內)라고 하는 데 기모노를 입은 일본 친구와 가부키를 보러 가서 가부키 공연 중간에 도시락을 먹은 적이 있다. 그날 벤토(도시락)는 수수한 3,000엔짜리였고 가부키는 1등석이 1만 8천 엔이었다. 둘이 가부키를 보고 도시락 하나 까먹고 나오는데 1인당 2만 엔은 족히 써야 하니까 한국 돈으로는 26만 원쯤 된다. 물론 3등석이면 돈이 더 적게 들고 도시락도 주먹밥이면 더 싸게 먹히지만 더 비싼 도시락도 있다. 가부키(歌舞伎)는 말 그대로 노래
“지진 보도가 불안만을 부추기는 기사가 아니길 빈다.”라면서 마이니치신문 카고시마 지국장은 작가 오에겐자부로와 그 큰아들 이야기를 시작으로 ‘희망’을 말하고 있다. 가와바다야스나리(川端康成)에 이어 일본 문학사상 두 번째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오오에겐자부로(大江健三郞) 씨는 큰아들의 뇌장애로 인해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오오에 씨는 한 강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뇌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평생 아들은 말을 못할 것이라고 여겼다. 5살 때 일이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새 소리가 흘러나오자 아들이 평소와 다르게 눈빛을 반짝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 그날 이후 각종 새 소리를 부랴부랴 녹음했다. 그리고 새 소리 뒤에 “참새입니다” “뜸부기입니다” “종달새입니다”라고 새 이름을 녹음 한 뒤 날마다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아들을 목마 태워 집 근처를 산책하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새소리가 들려오는 것이었다. 가만히 들어보니 목마 탄 아들 입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뜸부기입니다” “종달새입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5살이 되도록 한마디 말도 못하던 아들 입에서 비록 소통의 언어는 아니지만 “뜸부기입니다”를 되뇌는 모습에서 오오에
사상 유례없는 일본동북지방의 대지진 참사에 희생된 분들의 명복을 빌며 피해를 입은 분들의 조속한 복구를 기원합니다. -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 회원 모두 드림- 지진사상 최악으로 기록되고 있는 일본열도의 재해를 가리켜 초토화니 궤멸이니 하는 말이 돌아다닌다. 진앙지와 가까운 동북지방의 피해는 인적 물적 피해를 포함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만큼이라니 결코 남의 일 같지 않다. 시커먼 물기둥이 마을과 도시를 삼키는 모습을 보면서 대자연의 재앙 앞에 인간의 한없는 무기력을 절감해본다. 한국 방송들도 첫날은 반복해서 악마와 같던 지진해일의 순간을 영상으로 보도하더니 점차 재해를 만난 사람들에게로 카메라 앵글이 집중되고 있다. 어느 나라든 지진 현장을 보면 상점가로 뛰어들어 물건을 훔치는 약탈자 한 두 사람 나오게 마련이고 어린아이 시신을 부여잡고 울고불고 하는 모습이 화면을 통해 보도되곤 하는데 견주어 일본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주제로 글을 쓴 사람이 있다. 대만의 왕영림(王榮霖) 씨가 그 사람이다. 그의 글이 차이나넷 일본어판에 오르자 이 글이 다시 3월 14일자로 일본전역에 타전되었다. “일본대지진에 보인 일본국민의 높은 민도(民度)”라는 제목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