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병신년 마지막 눈이 흠벅내린 설악산내설악을 걸어보았다. 그 내설악 계곡을 흐르는 계곡을 백담계곡이라 부른다. 내설악 입구는 인제군 북면 용대리이고 여기서부터 8km 안쪽에는 백담사가 있다. 그리고 백담사에서 산길로 10km 계곡을 끼고 오르면 내설악 만 안쪽에는 봉정암이 있다. 그용대리 입구부터봉정암에 이르는 계곡에는흐르는 계곡을 따라 수많은 여울진 물도리가 있다하여 이곳을 백담계곡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눈덮인 내설악 백담계곡에 얼어붙은 여울도 보고, 그 얼어붙은 계곡을 따라 오르고 내리면서 담아온 수많은 여울들을 함께 감상해 보고자 한다. 과연 백개인지 천개인지 백담계곡에는 여울들이 가득하였다. 백담계곡의 '백'은' 백개'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수'를 통틀어 부르는 이름이 아닌가 싶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백담계곡은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고대 한민족은 고조선에서 내려온 부여족이 따스한 남쪽나라로 내려와 고대국가를여럿창건하였다.고조선이 여러 분국으로 분화하면서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는 고구려가 터를 잡았고, 또 다른 부여족은 중국동부지역 산동반도와 한반도의 서남쪽지역에 터를 잡고 백제를 건국하였다. 이때 백제인들은 산동반도와 한반도를 오가는 뱃길을 주름잡고 항해술과 조선술이 발달하여 동아시아해상세력으로 성장하여 뱃길을 장악하였다. 백제인들은 한반도 서남쪽에만 좁은 지역의 부족국가와 같은 작은 고대국가가 아니라 동아시아의 해상무역을 주름잡던 세력으로 중국과 한국 그리고 일본을 연결하는 해양대국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백제가 멸망한 뒤에도 중국 동해안과 한국 일본을 연결하는 무역선과 항로를 장악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해상왕 장보고 또한 이들의 후예였다. 이런 백제는 지금으로부터1500년 이전에 이미 항해술을 바탕으로 인도에까지 가서 불경을 직접 구해오기도 하였다. 이때 중국과 한국이 불교를 중심으로 사상적 통일을 이루었지만, 불경이 들어오던 길은 대부분 북방의 고비사막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통하거나, 그 북쪽 유목민족들이 장악했던초원길을 돌고 돌아 목숨을 걸고 엄청난 고생으로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사진가들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가본 옥정호 붕어섬의 모습이다. 겨울이면 해의 고도도 낮고, 또 남쪽으로 많이 내려오는 해돋이 장면을 담을 수 있어, 하얀눈과 함께 평화로운 시골모습과 산과 강이 어우러지는 정경을 담고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요즈음에는 태양이 아침 7시 40분 쯤 뜨기 때문에 일출을 보기 위해서 새벽같이 산에 오를 필요는 없어서, 저녁을 그런대로편안하게찜질방에서 보내고, 아침 일찍 일어나 6시쯤 차를 몰아 옥정호 전망대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도착해보니 6시 30분쯤... 보통 이시간이면 국사봉으로 오르는 주차장에는우리 일행이 처음일 시간인데, 오늘은 주말이어서인지 전국에서 국사봉과옥정호 붕어섬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와서 주차장을 가득 채우고, 주차장 입구 도로에까지 10여대의 승용차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옥정호 붕어섬의 인기를 알만한 순간이었다. 우리 일행도 어쩔수없이 주차장 입구 도로변에 차를 세우고 30여분 가파른 눈길을 걸어올라 해돋이를 찍기 위해 전망좋은 곳을 찾아 삼각대를 세우고 붉게 물드는 일출지점을 중심으로 구도를 잡고 기다렸다. 저녁에는 흐렸지만 아침이면 맑을 것이라는 일기예보를 믿으며, 오늘
''''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려운 시절 한목숨 부지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때에도 일제에 아부하며 호사스러운 생활을 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이들을 우리는 친일파, 더 나아가서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라는 딱지를 붙여주었다. 그러나 이들은 항변한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어쩔수 없이 친일했던 것이며, 나름대로 조국의 근대화에 상당한 공헌을 했노라고... 그러나, 이러한 어려운 시절에도 민족의 선각자로 어렵지만 독립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던 분들이 있다. 그 가운데 불교의 스님으로 만해 한용운과 백용성 스님이 있다. 만해 한용운은 1919년 3월 1일 맨손에 태극기만을 들고서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만세운동에 앞장서 독립선언서의 기초에도 관여했고, 그 부칙으로 '공약삼장'을 더함으로 한민족의 독립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가를 역설했으며, 독립만세운동의 의미와 각오를민족을 대표로 나선 이들이 스스로 다짐하게 했으며 그 뜻을전세계에 전했다. 3ㆍ1만세운동을 무사히 마친 뒤 만해는 민족대표 33인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차가운 형무소에 갇혀서도 결코 비굴하지 않고 오히려 떳떳하게 그리고 형무소 간수들에게 감화를 주면서 만기를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12 중순이지만 겨울 추위가 좀 뜸해서 서울성곽 동쪽에 있는 혜화문을 거쳐 성곽길을 걸어보았다. 혜화문은 본래 현재 서울에서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대로의 중심에 있었던 문이나, 일제강점기 도로가 뚫리는 바람에 없어졌전 것을 본래 혜화문위치에서 벗어난 언덕위에 복원한 성의 문루이다. 본래 위치에 세우려면 도로의 양 옆에 있는 성곽을 콘크리트 다리로 잇고, 그 위에 혜화문을 다시 이전해야 할 것이다. 복원된 혜화문을 돌아서 서울 성곽길을 따라 성북동으로 오르는 길 언덕에는 많이도 훼손되었던 성벽들을 부분적으로 복원하였고, 성벽의 외부에는 대부분 한국전쟁 이후 들어선 민가들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성벽을 따라가다보면 성곽의 외부에서 내부로 내부에서 외부로 오고 갈 수가 있는데, 이를 따라 오르다가 암문에 이르러 외부로 나오면 성북동 북정마을이 있다. 그 마을의 민가 가운데성북동 심우장이 있다. 심우장은 일제감점기 불교의 스님으로 민족시인으로독립운동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만해 한용운스님이 집을 짓고 살던 집이다. 심우장이란 스님들이 자신의 본성을 찾는 것을 소를 찾아 떠나서 가진 고생 끝에 소를 찾고 이를 길들여 집으로 돌아온다는 내용을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 위 사진들은 경복궁 옆 고궁박물관에서 전시중인 전시품들이다. 지금은 많은 기계들이 발명되어 아무리 큰 집이라도 쉽게 지을 수 있지만, 100년 전에는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선조들은 조선의 대궐뿐 아니라, 그 이전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그 이전에도 거대한 궁궐들을 지어냈다. 그 중에는 80m가 넘는 황룡사9층탑이나, 미륵사9층탑도 이러한 도구들 만으로 지어냈으니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현재 전시중이므로 한 번 시간 내면 옛 선인들의 노고와 지혜를 느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시기간 : 2016년 12월 6일 부터 2017년 2월 19일 장 소: 경복궁 입구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실
[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양주 장흥 석현리 계명산 자락에자리 잡은대승사는 본래 서울에 있다가 1968년 이전하였으며, 대웅전은 1980년대 지었다. 양주 장흥 관광지역에 인접하고 있으며 대웅전 관음전 종무소, 요사채 등이 있고, 대웅전 옆에는 적상으로 지옥의 중생들을 구제한다고 서원한 스님머리의 지장보살이 6환장을 들고 있다. 경내 대웅전은 팔작지붕을 한 건축물로 화려한 다포집에 금단청을 하였다. 절의 대웅전은 궁궐의 정전보다도 화려하게 꾸미는데, 그 까닭은 대웅전의 주인인 부처님은 세상의 임금보다 더 귀하다는 의미가 있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국회 탄핵은 이루어졌지만, 방심할 수 없다는 국민들의 염원을 담아., 날씨도 추운 12월 중순임에도 국민들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추운날, 혼자라면 더 추울 것이지만, 함께한 광장은 서로가 촛불을 켜들고서로를 껴안으니 작은 촛불이 훈훈한 날로가 되어 춥고 어두운 밤을 밝힐 수가 있었다. 국회 탄핵의결로 마무리 되기에는 아직도 험난한 고난의 길이 있음을 이제 국민들은 알고 있다. 자칫 추위에 촛불의 힘이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또 다시 국민의 뜻을 왜곡하고 나설지 모른다는 사실을 이제 많은 국민들이 알아버린 것이다. 광화문 추운 돌바닥에 손에 손을 잡고 촛불로 불을 밝히는 모습은 한국민이 얼마나 평화적으로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제 전 세계인이 시위문화를 배우기 위하여 서울로 서울로 몰려들고 있다. 이 장엄한 국민들의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행동에 감동과 찬사가 쏟아지고 있으며,그 현장에서 취재하는 기자 또한 시대의 증인으로 참석하고 있음이 감개무량하였다.
[우리문화신문=최우성 기자]
[우리문화신문=최우성기자] 왕흥사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도 나오는 백제의 절이다, 왕흥사의 창건은 백제 법왕 2년 (서기600년) 공사를시작하여 무왕 35년(서기634년) 완공된 것으로 기록되었다. 왕흥사지는 백제가 멸망한 뒤 불에 타 절의 전각이 사라지고, 이후 땅속에 묻혀서 잊혀진 절이었으나,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들이 옛 기록을 근거로 부여 근처를 수소문하여 절터로 추정된 곳에서 왕흥(王興)이라 쓰여진 기와조각을 발견하여 이곳이 왕흥사터임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부분 절의 전각이 목조로 되어있었기에, 그 흔적조차 찾기가 어려웠다. 당시에는 절 내 가장 높이 솟아 있던 탑도 우리가 탑하면 떠오르는 돌로된 석탑이 아니라 목탑으로 조성하였기 때문에 탑의 흔적도 없었다. 당시에는, 석등 또한 돌로 만들지 않았었다. 사찰의 중심에는 등조차 목등이었기 때문이다. 발굴된 사리자엄구 겉에 쓰여진 글자를 해석해보면 577년 초기 "백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인 왕자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면서 어렵게 사리를 구하여 절을세우기 시작했다."고 쓰였다.그런데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왕흥사는 백제 법왕2년*600년) 착공하여, 30여년의 역사 끝에 무왕 때에야 완성을